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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ary/▶ 아무 얘기

익명성과 공연성의 경계

by 레블리첸 2020. 2. 10.

 

http://blog.naver.com/ravlitzen/220368227569

 

익명성과 공연성의 경계

From. 블로그씨 나도 답하기▶ 저는 블로그가 어쨌든 익명이라서 좋아요. 여러분은 익명의 공간이 좋으세...

blog.naver.com

 

 

 

 

 

익명이면 편한 점이 많다. 사람들의 이목을 피할 수 있다는 건 일단 공인보다는 방어막을 하나라도 더

 

겹치고 있는 셈이다. 도덕적인 사람이건 아니건간에 어쨌든 익명성이 보장되는 공간에선 사람이 남의

 

이목을 신경쓰지 않기 때문인지 곧잘 비윤리적인 행동을 저지르며 난폭한 언행을 일삼게 되기가 쉽다.

 

차만 타면 인격이 바뀌는 것처럼 자신을 보호해줄 울타리 안에 있다고 생각되면 꼴리는대로 행동하게

 

되는 성향이 잠재되어있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감추고 싶은 비밀이나 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 보여주고 싶지 않은 모습 등이 있다. 예컨대

 

간섭이 심한 부모에게 보여지기 싫은 일기가 있고 친한 친구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비밀스러운 사건.

 

모두에게 자신의 정체를 알리고 행동한다는 건 솔직히 익명으로 활동하는 것보다 불이익이 더 많은 게

 

사실이다. 당연히 익명성은 행동의 제약을 덜어주기도 한다.

 

직접 운영하고 있는 블로그에 작성하고 있는 이 글만 봐도 부모님이나 형제가 볼 수 있다는 사실 탓에

 

평소 욕설을 맛깔나게 섞어쓰는 편인데도 불구하고 자제를 하고 있다. 내가 아무리 개차반이라도 부모

 

보는 앞에서 욕지거리를 일삼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예전까지는 철저히 닉네임이라는 익명을 유지한 채 블로그를 운영하고 게임을 했다. 기껏해야 이름 및

 

성별 정도만 밝힐 뿐이고 때때로는 성별까지도 오해를 하도록 방치해두었던 적도 있었다. 주제를 조금

 

벗어난 이야긴데 몇몇 지인들 사이에서는 내가 우상화가 진행되어서 현실에서조차 멋있으며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인식이 박혀있었던 모양인데, 정작 타자를 치고 있는 본인은 그런 이미지와 거리가 멀었다.

 

그런 괴리감이 도리어 부담스러웠고 부끄러웠다. 그땐 나의 닉네임에 가리어진 진짜 나와 온라인 상의

 

내가 더이상 자신으로 생각되지 않아서 위화감과 자괴감이 심했었다.

 

우연히 한 친구가 내 블로그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 친구는 내 블로그에서의 모습과 내가 딴 판이라

 

말했다. 의도야 어찌됐건 의견을 접하는 건 반가운 일이라 나는 이로 인해 익명으로 살며 점점 이 가상

 

세상에선 완성형의 인간이 되어가지만 현실에서는 전혀 그렇지 못한 본모습을 지인들에게 보여준다면

 

상처를 주고 상처를 입을까봐 두려워하게 되었다. 동시에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사이버 상의 자신과 날

 

대조하면서 고통을 받았다. 스트레스 풀려고 하던 짓이 날 옥죄기 시작한 것이다.

 

생각해보면 닉네임만이 유명해졌을 뿐 나 자신은 전혀 유명해지지 않았다. 언젠가는 주변인 중에 내가

 

제작했던 부끄러운 영상을 재미있게 보았는지 내가 만들었던 영상을 나에게 보여주면서 소개해주었다.

 

내 정체를 모르는 이 친구는 연신 영상 제작자의 남 다른 센스를 칭찬하기 바빴고 난 그 칭찬을 들으니

 

몸둘 바를 모르겠는 게 아니라 고개를 못들겠더라. 난 칭찬을 받을 수 있을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생각해보면 그렇게 온라인에선 사람을 끌고 모아서 다닌 주제에 연락을 할 정도로 긴밀한 관계는 전혀

 

만들지 못했다. 이처럼 모든 것을 드러내면 약점이 많아지는 법이지만 반대로 너무 자신을 드러내지를

 

않으면 진실로 가까이하는 사람을 얻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은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

 

또 알아봐주기를 내심 바라는 생물이다. 그런 점에서 너무 과도한 이목이 집중되지 않으면서 적정하게

 

인기와 인지도를 누렸으니 행복했었는지는 몰라도.

 

 

 

  • 공연성과 익명성 중에 무엇을 선택하는 것이 이득이란 말인가?

익명의 가면을 쓰고 활동하는 온라인과 자신의 민낯을 드러내고 사는 오프라인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이미 어불성설이다. 남들에게 자신을 보여주기 쉽지 않은 온라인이라도 유명해지고 나면 자신의 진짜

 

모습을 드러내야 하고 공연성의 대표적 예시로 들 수 있는 연예인들도 때론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로

 

활동하고 싶을 때가 있는 법이다.

 

그렇지만 오늘날 익명성과 공연성 사이에 뚜렷한 경계가 사라졌다고도 볼 수 있겠다. 자신의 익명성을

 

지켜주는 가면으로 사용하던 닉네임을 캐릭터로 재창조하여 공공연하게 사용하는 사람들 역시 적잖이

 

봐왔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유명 웹툰 작가 레바, 스트리머 대도서관처럼 말이다.

 

 

그러나 각각의 장단점을 알아두면 좋다. 익명성의 장, 단점은 위에서 설명했으니 차치하고서 공연성의

 

단점으로는 행동의 제약을 크게 받는 것이라고 밝힌 바가 있는데 공연성을 띄었을 때의 장점 중에서도

 

가장 막강한 부분은 살을 내어주고 뼈를 취하는 전략을 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에는 옛날처럼 사람들이 무지하고 기술이 없지 않아서 과거에 철옹성이라고 불리었던 익명성의

 

뒤에 숨어 숨죽여봤자 소용이 없다. 익명성과 공연성의 경계가 허물어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2015년 5월 23일, 하고 싶은 말이 뒤죽박죽이었던 원문을 뜯어고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