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주말에는 재미있는 일이 많았다. 이웃분이 고기 한 덩어리를 주셨다. 비록 조리를 하지 않아 먹지
못했지만 일단 선물은 항상 기쁘고 감사하지. 굉장히 날것으로 받아서 묘했지만 어쨌든 친구들이랑도
떠들 주제가 되어 이래저래 유용했다. 생고기 받는 게 흔한 일은 아니잖아.
얼마 전에 결혼한 전직장 선배와 저녁 식사를 했다. 이제 막 결혼한 유부남이 무슨 돈이 있겠냐면서
내가 대접해드리려고 했는데 기어코 밥을 사시더라. 다음달에 꼭 돈쭐 내주기로 했다. 나름 비싼 데
가서 먹었는데 매우 맛있어서 간만에 위장이 놀란듯했다. 그동안 거지발싸개 같은 것만 먹어대더니
웬일로 사람 먹을만한 음식을 위장에 주냐며 반가워 하더군.
하지만 역시 여기서 내가 대접하는 게 낫지 않았나 싶었다. 대신 커피 샀다. 커피 홀짝이며 두런두런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름대로 알찬 시간을 보낸 기분이다. 오랜만에 즐거웠고
헤어질 때까지 내 입장에서는 완벽했다.
일요일이었지. 새겨듣진 않았는데 조소라고 해서 흙을 빚어 상을 본따 만드는 미술의 일종인데 입시
준비하는 학생을 위해 모델이 되어주는 알바가 있길래 냉큼 신청했었다. 당장 일요일이 된 순간에는
그냥 집에서 잠자코 잠이나 잘걸 후회했지만 돌이켜보면 꽤나 신선한 경험이어서 보람찼던 것 같다.
모델일이라는 게 그저 멍하니 앉아있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만만치가 않더라고.
학원 내부 공기는 쌀쌀했고 흙을 다루는 일이기 때문에 먼지가 많았었다. 그런 주제에 모기 한마리가
돌아다니는 등 근무 환경은 최악을 달렸던 것 같다. 발열 조끼를 입은 덕에 냉기는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었다만 오후에는 보조배터리 전력이 바닥나서 결국 추웠다. 보수도 만족스럽진 못하다. 시급 만원
정도인데 차라리 땀 시원하게 빼는 노가다 한탕 뛰고 14만원 버는 게 훨 낫지 싶다. 하지만 일요일엔
대게 현장일이 없으니까 어쩔 수 없지.
본격적으로 일이 시작되었다. 학생들 가운데에 서서 마치 캠프파이어 모닥불처럼 우두커니 정면을 보며
앉아있어야 한다. 가만히 있는 것만은 아니고 5분마다 90도로 회전하고 20분마다 5분씩 휴게한다. 나름
버틸만 했다만 의자가 굉장히 불편해서 허리랑 엉덩이가 아팠다. 앉아있으니 고역이었는데 한쪽 귀에는
이어폰을 끼고 노래 듣는 것이 가능했지만 골전도 무선이어폰을 쓰기 때문에 학생들의 소음을 벗삼아서
가만히 명상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더 힘들었나.
휴게 시간을 많이 보장해준다고 하지만 20분마다 5분 쉬는 것을 제대로 쉰다고 표현할 수나 있을지 싶다.
20분 뺑이치고 일어나서 허리 두드리고 스트레칭 좀 하면 준비하라고 경종이 울린다. 점심 시간 1시간을
제외하면 8시간 내내 5분마다 회전하는 것을 무한 반복한다. 정신 나갈 것 같더군.
한편으로 도대체 미술이란 어떤 의의가 있는 건가 고찰하게 되었다. 3D 프린팅 기술이 나날이 발전하고
보급화되며 상을 따는 일은 사진과 영상 기술이 압도적인데 과연 흙을 빚어 사람 형상을 본따는 이 일이
어떠한 의미가 있는가 싶었다. 단순히 좋은 미대 입시를 하기 위함이라면 이해는 될 것 같았다만.
객관적으로 미술가에게 얼굴 평가를 받아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었다. 안와가 튀어나오고 턱이 들어가
있으며 좌우 광대가 비대칭이기 때문에 조형할 때에 특히나 주의를 기울여야만 한다는 조교의 평가는
가슴을 후벼파더군. 성형외과를 찾아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면 철인이겠지. 자존감이 나처럼
강하지 않다면 마음이 꺾여서 근로 의욕이 사라질지도 모른다. 겁날 거고.
의자가 편안했으면 좋으련만, 등을 기대면 의자가 맹렬하게 삐걱거리고 미술실 공기는 차갑고 엉덩이
베겨서 죽을맛이다. 남자 알바생이 혼자인 것이 이해된다. 이짓거리를 하고 7만원 받을 바에는 즐겁게
공사현장에서 아저씨들이랑 하하호호 웃으며 땀 흘려 일당 벌어가지 싶었다. 점심 식대까지 안 주니까
상당히 꼬움 게이지가 올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주변에 먹을만한 곳도 없고.
단기 근육 피로가 적고, 기술도 필요 없지만 그만큼 보수가 적고 환경은 열악. 정신이 혼미해져 가더라.
역시 현장일이 최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 이렇게 멍 때리고 있으니 얼른 회사에 출근하고 싶어졌다.
머릿속으로 엑셀 함수식을 도대체 몇번 쓰고 지웠는지 모른다. 한참 옛날 잊은 소설 줄거리도 떠올랐다.
군대에서 초소 근무하던 때도 떠오르더군.
다행히 예정보다는 1시간 일찍 끝났다. 지끈거리는 허리를 두드리며 귀갓길엔 친구랑 내내 수다 떨었다.
얼른 씻고 글 쓴 뒤에 자고 싶었는데 화장실 변기 막혔다고 고시원 원장님이 울상이더라. 나도 샤워하고
싶은데 못씻어서 우울했다. 결국 아래층 내려가서 씻었다만.
퍽 뒤틀린 체형에 고운 얼굴이 아니라서 학생에게 좋은 모델이 되지 못했고 오히려 과제만 된 것 같아서
마음이 썩 좋지 못했다. 일이 끝나면 나름대로 보람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괜히 울적해지기만 하더라. 돈
들어오니까 금융 치료가 되긴 했다만. 얼른 안전화 구매해서 현장을 뛰고 싶은 마음만 커졌다. 그렇지만
아마 내달부터는 피부과 진료받을 예정이니까 현장일 하는 건 무리가 있지 않을까 싶군. 하지만 또 다시
이 학원으로부터 모델 알바할 시간 있느냐고 제안을 받았으니 나름대로 모델로서 과락은 넘긴 모양이다.
안타깝게도 이미 다른 주말 알바 일정을 잡아버렸기 때문에 참여는 못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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