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 주말에는 고시원 원장님이랑 술 한잔 했다. 한잔이라고 하기엔 조금 오래 마시기는 했구만. 고시원
원장님은 상당한 애주가이시기 때문에 주량에 한참 못미치셨다곤 하지만 오후 13시에 가볍게 마시자며
불려서 그날 18시까지 줄창 5시간 남짓 앉아서 둘이 맥주 대형 페트병으로 4개를 마셨으니 꽤 오랫동안
마신 셈인데. 원래는 정말 한두잔 정도만 마실 생각이었는데 내 입장에서는 과음을 해버렸다. 원장님이
워낙에 쾌남이시고 말주변이 좋으셔서 오래전의 이야기나 군대 이야기를 듣다 보니까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버렸더군.
사무실에서 같이 여자 아이돌 영상을 찾아보거나 원장님이 진성 밀덕이셔서 각종 군부대 영상 및
공용화기 관련 영상을 보는등 남성 농도가 높은 이야기를 나눴는데 웃을 일이 좀처럼 없는 시대에
상당히 폭소했다. MBTI에 거부 반응이 있으셔서 검사해본 적이 없다고 하셨는데 아마 검사해보면
틀림없이 외향적인 E 성향이 나오시겠더라. 얻어마시기만 하면 송구하여 간식과 맥주 2병 추가로
편의점에서 사와서 더 마셨다. 돌이켜보면 이쯤에서 파하는 게 나로선 좋았겠지만.
부먹이셨군요...
고시원 원장님은 가방끈이 기셔서 굉장히 박학다식한 편이시기 때문에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가 보면
다양한 잡학 지식을 얻을 수 있는데 상당히 고풍스러운 단어를 많이 알고 계신다. 예를 들자면 청요리
라는 표현인데 중국 음식을 달리 뜻하는 말이라고 하더군. 부유한 사람들의 사이에서만 구전되다시피
하는 단어라서 서민층에게는 익숙한 말은 아니라고 한다.
간식과 추가 맥주도 원장님께서 사려고 했었는데 내가 계산을 했으므로 이에 대한 보답으로 탕수육을
대접해주셨다. 원래 탕수육은 부어 먹는 음식이라고 주장하시기에 소스를 부어서 먹었다. 눅눅해지는
것은 싫지만 소스가 깊이 베어들어 맛이 있었다. 어쨌든 눅눅해지기 전에 먹어치워버리면 그만이잖아?
Profit!
술자리는 이토록 너무나도 즐거웠지만 후폭풍은 웃어넘길만한 일이 아니더군. 두통 때문에 제대로 잘
수가 없어 괴로웠다. 괴로움을 잊기 위해 술을 마신다는 사람을 여럿 보았는데 이는 혹시 팔 아프니까
다리를 분질러서 팔의 고통에서 눈을 돌리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내가 알고 있는 여자 사람 친구
중에서는 십중팔구가 술을 진탕 마시고 다음날 죽자는 일사각오의 정신으로 술자리에 임하는데 과연
이 대한민국에서 여성으로서 살아가는 게 얼마나 고달프길래 저런 미친 짓들을 감행하는지 헤아리기
어려울 지경이다.
취기에 허덕이며 지끈거리는 머리를 때로는 꽝꽝 치면서 잠에 들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육포, 감자칩,
견과류에 탕수육까지 다양한 음식을 5시간 동안 쉬지 않고 위장에 우겨넣으며 끊임없이 맥주를 속에
들이부었으니 속이 그야말로 엉망진창일 수밖에 없지. 술이란 병든 육신과 고뇌로부터 해방시켜주는
유일한 탈출구라고 하던가. 그러한 상황이라면 맞닥뜨린 문제들로부터 회피하는 것보다 몸과 정신을
달래고 해결책을 모색하는 게 유익한 방향이라고 생각이 드는데 디오니소스를 향해 욕까지 퍼부으며
겨우 잠에 들었다.
별로 술을 마시지 않다 보니 몰랐는데 나는 전혀 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시간을 요긴하게 쓰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마취되어 몽롱해진 정신으로는 또렷하게
사고할 수 없고 이후에는 숙취 때문에 침상에서 한동안 앓아야 한다는 것이 큰 시간 낭비로 느껴진다.
게임으로 비유하면 술이란 마비약 같은 아이템인데 적한테 사용히지 않고 스스로에게 왜 사용하냐고.
주변에는 없지만 세상 어딘가에는 세상을 잊기 위해 술을 매일 달고 지내는 사람이 있다고 들었다. 퍽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고 싶은 게지.
간과 위가 제 기능을 본디 하지 못하여 술이 유독 힘든가 보다. 술은 심리 안정제. 이미 심리 안정중인
내게 있어 무의미하여 그저 육체적 고통만을 남긴 것이라 생각이 드니 꽤나 괜찮은 삶을 살고 있다는
방증인 것 같아 내심 뿌듯해지기는 했다. 원장님과의 술자리에서 나눈 대화는 즐거웠지만 결국 못한
한자 강의와 중국어 공부가 계속 마음에 걸리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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