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출발하려는데 뜬금없이 외로움과 슬픔 및 세상에 혼자 남겨질 것이라는 두려움, 아직 관계를
돌이키려면 늦지 않았다는 조바심이 들더군. 아마도 30살이 가까워지면서 거울을 보았을 때도 더는
빛나는 청춘이 아닌 자신이 비추어져서 그런 모양이다. 마음을 추스리기 위해 출근길에서 지난 날에
받은 서신을 쭉 읽으며 분노의 감정을 다시 살찌웠다.
도착하니 좀 이른 시각이었다. 대충 주변 배회하다가 일 시작. 2층짜리 건물 내부를 청소하는데 양이
많지 않아 의아했다. 듣기로는 뭐하러 둘씩이나 불렀냐는 말이 나오기도 해서 동반 작업자분과 개꿀
이라며 쾌재를 불렀다. 기껏해야 바닥에 널부러져 있는 폐기물 치우고 바닥이랑 계단 좀 청소해주고
딱히 할 일이 없어서 조적공 심부름 좀 떨떠름하게 해주곤 했다.
그런데 뜬금없이 벽돌 400장이 들어온다는 얘기가 들리더라. 뭔가가 쎄해서 관리자에게 따져보니까
'원래 우리들은 잡부로 고용해서 폐기물 처리 외 잡다한 일을 시킨다. 일이 싫으면 그냥 가라,'고 한다.
게다가 모든 벽돌이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몇 장만 마대에 담아서 가지고 올라오면 된다고 말하더라.
말투가 좀 띠껍긴 했지만 그러려니 했다.
그후 도착한 건 벽돌 400장과 모르탈 10포. 양이 확실히 애매하긴 했다. '이정도는 그냥 의리로 해줘,'
라고 하기 딱 좋은 정도더라. 하지만 했다간 호구 잡힐 게 뻔해서 동반자랑 손놓고 있으니 기본 일당
13만원에서 2만원 더 쳐주는 것으로 협상했다. 15만원에 계단으로 2층에 벽돌 400장과 모르탈 10포
양중이면 나쁘지 않은 것 같아서 일단 했다.
모르탈을 전부 올리고 벽돌도 300개 정도 전달하고 그 외에 가구나 철제 의자들을 3층인 옥상까지 올렸다.
계단이라 빡세긴 했는데 할만은 했다. 점심 끝나고 오후도 양중 마저 하나 싶었는데 15만원까지 썼으니까
알차게 활용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옥상으로 부르더라.
나무바닥에 그어진 먹선을 따라서 나사를 박는 일을 시켰다. 정확한 작업 명칭은 모르겠지만 분명 폐기물
정리 및 현장 청소를 부탁받고 왔는데 좀 어이가 없었다. 어쨌든 토목과 출신답게 토공과 목공을 이제서야
전부 달성했구나 자조했다.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바닥에 깔린 나무판과 그 아래 철판을 고정하는 일이라 체중을 싣지 않으면 나사가
들어가지 않아 오리걸음 자세가 추천되기도 했고 방아쇠를 누르고 있어야만 하는 손과 다리, 허리가 제법
아팠다. 효율은 다소 떨어져도 양반다리로 앉아 번갈아 쓰니까 근육 피로가 덜하긴 했다. 그래도 17시까지
꽉 채워서 일하니까 집 가면 뻗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돌아가면 기초공학 노트 작성할 생각에 눈앞이 아득
해졌다.
일 끝나니까 곧바로 계좌에 15만원 꽂아주더라. 알고 온 업무랑 너무 달랐어서 1만원 더 부를까 고민하다
말았어서 좀 찝찝했지만 처음으로 협상해본 거라 좋은 경험으로 삼기로 했다. 수수료 1만 3천원만 넣어도
되나 싶었는데 다음날 확인해보니 계약금이 15만원으로 올라가 있어서 수수료 미납분을 치루긴 해야했다.
아마 같이 일했던 반장님이 조금 얼타고 약삭빠르지 못한 인상이시던데 발설해버리신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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