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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EA/▶ 장편 소설

오는 뉘 1화

by 레블리첸 2021. 1. 10.

 

 

 

 

/게임 시놉시스

웅성웅성하는 소리 속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흐린 형체들을 반쯤 감긴 눈으로 응시하다 몇 번 눈을

깜빡깜빡. 서서히 멀어져 가는 소음 저 끝엔 어쩐지 통곡 소리가 길게 들렸던 것만도 같다. 이젠 다

먼 나라 이야기. 오래 참은 졸음 끝에 겨우 폭신한 이불 위로 마치 아버지의 양팔에 안긴 채 천천히

떨어지는 듯한 감각.

그때 갑자기 눈이 번쩍 뜨였다. 조금 전까지의 몽롱함과 피곤함은 온데간데없고, 맑아진 정신으로.

새하얀 침구 위 온통 새하얀 벽과 새하얀 가구에 둘러싸인 채 정신이 깨었다.

'여긴 어디지?'

생각하는 찰나 눈 깜빡하는 사이에 저만치 정면에 하얀 머리에 낯이 익은 여자아이가 하얀색 원형

탁자 위에 다리를 꼬고 구부정한 자세로 앉아 턱을 괸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놀랄 만도 한데

마음은 고요하고 정신만이 호들갑을 떨고 있는 기묘한 상황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가만히 그 애와

눈을 맞추고 있으니 한참 후 눈을 가늘게 뜨며 빙긋 웃고는 안부를 건네는 것이었다.

여자아이는 자세를 고치고는 일어나 조금 전까지는 흰색이었던 연하늘색 블라우스 밑단을 잡아서

펼쳐 주름을 없앤 뒤 천천히 침대의 머리맡 쪽으로 걸어왔다. 그녀의 양팔이 허공을 가로저을 때에

바람과 함께 복숭아 내음이 실려왔던 것 같다. 분명 빈손이던 그녀의 손에는 어느새 거울로 보이는

물건이 들려있었다. 아이는 거울로 나를 비추어 보였다.

하얗게 샌 머리와 눈썹 사이의 이마엔 자글자글한 주름. 이 상황에 여전히 익숙해지지 못해 최대한

부릅 뜬 바둑알처럼 검은 눈 밑은 사신의 옷자락과 같이 검다. 턱 근육의 노화로 다물어지지도 않는

입가에는 듬성듬성 수염이 남아있었고 전체적으로 뼈와 가죽만 남은 야윈 몸은 품이 남는 환자복에

둘러싸여 바람맞는 사시나무처럼 애처로이 떨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의 자신이 분명했다.

양손으로 수첩만 한 사각 거울을 들고 자신을 비추던 아이가 눈길을 보내오며 가장 행복했던 시절을

떠올려보라고 말을 건네자 곧 거울 속에는 말쑥한 정장을 빼입은 중년의 남성이 비추어졌다. 젊었을

때의 자신이 분명했다. 아이는 이번엔 가장 즐거웠던 때를 떠올려보라고 말했다. 그러자 거울 속에는

짧은 머리에 교복을 입고 있는 앳된 소년이 비추어졌다. 어렸을 때의 나다.

'그럴 리가 없는데.'

라고 생각하자마자 눈을 깜빡하는 사이에 금세 아이의 모습은 사라지고 조금 전의 사망 직전 노인이

거울 속에 나타났다. 고개를 떨군 채 자신의 양손을 펼쳐 내려보자 말라비틀어진 손가락과 볼품없이

떨고 있는 가느다란 팔뚝이 시야에 들어왔다. 어떤 모습이든지 다 될 수 있다는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귓전을 때리자 전신이 다시 원기를 되찾았다.

다시 고개를 들어 자신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는 여자아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당신의 정체를 묻지는

않았다. 어째선지 그것을 물었다가는 스스로가 창피해질 것 같았기에. 소녀는 어느샌가 빈손이 되어

눈을 지긋이 감고 어깨를 조금 넘는 중단발의 머리칼을 쓸어넘기면서 고개를 한번 갸웃하곤 또 빙긋

웃으며 천천히 눈을 반쯤 뜬 상태로 이제 그만 일어나 바깥으로 나가자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