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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EA/▶ 장편 소설

오는 뉘 2화

by 레블리첸 2021. 1. 14.

 

 

 

 

문을 열고 새하얀 방을 나와 정신을 빼놓을 정도로 하얀 복도로 나왔다. 아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장

구두 소리를 내며 앞장서 걸어갔다. 고개를 왼쪽으로 돌렸더니 막다른 벽이 보였다. 어쩔 수 없이 아이의

뒤를 따라갔다. 살랑살랑 마치 시계의 추처럼 좌우로 흔들리는 여자아이의 뒤로 묶은 머리카락 꽁무니를

눈으로 좇으면서 걷고 있다 보니 불현듯 누군가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마주했었던

순간부터 어쩐지 낯설지 않았다. 검은색의 단화 위로 종아리까지만 올라오는 하얀 무릎 양말은 너무나도

생기가 넘치는 살구색 살결을 적당한 간격으로 두고 슬와 부를 슬며시 보여주면서 백과 황의 격자무늬가

새겨진 고동색 주름치마를 드리웠다. 허리춤에 밑단을 집어넣지 않아 부대기처럼 펄럭거리는 청 남방이

머리카락과 함께 춤을 추는 듯이 움직이는 것을 구경하다 이내 움직임이 멈추자 소녀와의 거리가 단숨에

퍽 많이 좁혀졌다. 아이가 뒤돌았고 눈이 마주쳤다.

방에서 보았을 땐 키가 허리보다 조금 큰 듯이 보였던 작은 아이는 어느샌가 가슴 언저리까지 키가 자라서

사춘기가 한창인 아가씨의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당연하지만 방에서와는 전혀 다른 사람의 모습이었다.

사회에 저항이라도 하려는 듯 탈색이라도 한 것인지 하얀 머리와 눈썹만은 공통분모이지만 눈썹의 형태나

코의 생김새, 입술 모양과 두상이 완전히 달라졌다. 젖살이 아직 남아있는 턱 위로 양쪽 입꼬리만 희미하게

올라간 앙 다문 입술과 오뚝하지는 않아도 직반버선 형태의 콧볼이 작은 코로 이쪽을 가리키며 올려다보는

옅고 긴 눈썹 아래 입술을 닮아서 눈꼬리가 위로 향해서인지 장난기가 느껴지는 눈매의 아가씨와 한참 동안

시선을 교환하다가 그제서야 마음속으로 겨우 답이 떠올랐다.

방에서 처음 조우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이 아이는 온통 딸의 모습들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반가운 마음이 들어 자신도 모르게 소리 높여 그 이름을 부르려다, 마치 또 다른 자아가 있어 이를 저지하듯

숨을 삼켜서 소릴 죽였다. 분명히 나의 슬하에는 형제만이 있었을 터인데. 머릿속이 복잡해지자 여자아이는

눈치챈 것인지 무작정 설명을 하는 것보다는 보여주었을 때 더 많이 전달되고 깨닫는 것들이 있다고 말했다.

영문을 모르는 소리라고 생각했지만 분명 자신이 두고 온 아이 중에 딸은 없었음에도 목전의 형상을 딸이라

인식하고 있는 자신으로 번민을 하고 있었다.

자식을 먼저 보냈을 때의 설움은 아무리 뛰어난 문장가라도 그런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 와닿을 만큼 절절히

묘사할 수 없더군. 눈앞의 아가씨가 사라지고 어두운 회색의 바탕에 희미한 은빛 줄무늬가 새겨진 정장으로

마치 비탄을 덮으려는 듯 검은색 와이셔츠를 감싼, 풍채 좋은 남성이 두터운 손을 내 어깨 위에 올린 뒤 살짝

토닥이며 말했다. 고개를 사선으로 떨어뜨려 그의 손이 얹어진 자신의 어깨를 내려다보니 어느샌가 자신은

밝은 베이지색의 얇은 카디건을 걸친 주홍 원피스 차림의 여성이 되어있었다. 남자는 짧은 백발을 쓸어올려

한 번 이마를 보이고 나서 그의 두꺼운 구릿빛 손가락들을 타고 흘러내린 앞머리를 대충 손으로 정리하면서

무심한 듯 말을 이었다. 가늠조차 할 수 없는 긴 시간을 살았어도 결국 익숙해지는 고통도 없다는 걸 잘 알고

때문에 이런 극약처방을 내릴 수밖에 없다는 게 나 역시 친구로서 안타깝지만 이해해 주길 바란다고.

내가 전생에 두 형제로부터 애증의 대상이었던 한 아버지였던 것도 딸을 잃은 어머니였던 것도 다 떠올랐다.

자식을 잃었을 때의 그 한이 마치 열쇠가 돼 기억의 문을 연 것처럼 이 밖에도 막연하게 수많은 인연들이 내

뇌리를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 군인이기도 군사이기도 했고, 사업가이기도 했고 박봉의 근로자였기도 한

많은 인생들이 마치 주마등처럼 찰나에 순간에 함축되어 머릿속을 스쳤다. 아버지였고 어머니였던, 때로는

미처 꽃봉오리를 다 피우지 못하고 저물어버린 딸이자 아들이었던 자신이 걸어왔던 모든 길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한 번 눈을 질끈 감고 다시 떠서 눈앞에 선 남자를 노려보았다. 눈을 깜빡이자 다시 눈앞에 있던

사람은 갓 학교에 입학한 것처럼 보이는데도 자신의 신장과 비슷한 길이의 장궁을 걸쳐 멘 유소년의 상을

띄고 있었다. 배시시 웃으며 실로 가볍게도 조금 더 오랜 기억이라서 나를 떠올리려면 시간이 더 걸리겠지.

말하고는 한 손을 들더니 검지를 마치 쟁반을 그리는 것처럼 한 바퀴 돌렸다.

복도는 손가락을 따라 그 벽이 허물어지고 새로운 장소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어느새 응접실처럼

보이는 넓은 방안에 멀뚱히 서 있었다. 여기저기 뻗친 직모에 민소매 옷을 입고 있던 아이는 이번엔 붉은

베레모 아래 치렁치렁한 곱슬머리가 허리까지 내려오는 단정한 춘추계 유니폼 차림의 여학생이 되어 내

손을 잡아끌며 거실 중앙에 있는 낮은 탁자 앞뒤로 대칭되어 마주 보는 2쌍의 검은 소파 중 가까운 쪽에

앉힌 뒤 자신은 맞은편으로 가서 앉아 소파 속으로 꺼질 듯이 쏙 들어갔다. 몸을 왼쪽으로 틀어서 뒤편을

보니 흰색 문이 보이고 천천히 몸을 돌리며 주변을 살피자 좌측 벽면을 가득 메운 검은 선반에 빼곡한 책,

방 귀퉁이에는 녹색 잎이 풍성한 녹보수가 청아한 도자기 화분 속에 식재되어 방을 장식하고 방 중앙, 즉

소녀의 뒤로는 높이가 긴 직사각형 꼴의 창문으로 쏟아지는 햇살이 창살에 가려 붉은 융단이 깔린 바닥에

십자가를 그리고 있다. 눈을 굴려 우측으로 시선을 옮기려다 소녀와 눈이 마주쳐 멋쩍은 웃음을 지은 뒤

관찰을 이어갔다. 너비가 긴 붉은빛이 도는 목제 책상과 그 뒤엔 트로피와 상패들로 가득한 유리 장식장.

축 처져서 확인할 수 없는 제대로 확인할 수 없는 국기와 모 연맹 단체의 깃발이 교차되어 걸려있고 우측

벽면에는 시침과 분침이 없는 원형 시계가 걸려있다.

무언가를 두드리는 둔탁한 소리가 들리기에 고개를 돌려 다시 정면을 바라보니 아이가 눈웃음을 지으며

키 낮은 탁자 위에 깔린 유리를 노크하듯, 중지의 마디를 세워 두드려 주의를 끄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손 앞에는 김이 피어오르는 차 두 잔이 하얀 컵 받침 위에서 고풍스러운 흰 유리잔에 담겨있었다. 소녀는

약지와 중지 그리고 엄지로 손잡이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컵 받침을 들어 받친 채 우아한 자세로 컵을

들어서 한 입을 홀짝이고는 취향이라는 건 껍데기가 바뀌어도 영혼이란 것에 고정되는 모양이라 말했다.

손을 뻗어 잔을 들려다가 이번엔 꽤 굵고 거친 팔뚝을 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멈칫했지만 머잖아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짓고 컵을 들어 한 모금 들이켰다.

요란스럽지 않은 듯이 썩 잔잔하지만도 않은 이렇게 잠을 깨우는 방식이 나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다시 잔을 내려놓고 한 차례 기지개를 폈다. 소녀는 머릿결을 정리하다 자신의 교복 상의 주머니 위쪽에

묻어있는 머리카락을 집게손가락과 엄지로 잡아들어 입으로 불어 날려버린 뒤 작은 입을 움직여 말했다.

생을 거듭하면 거듭할수록 돌아오고 적응하는 데에 시간이 꽤 걸리는 모양이야. 마음 같아서는 한 번에

전부 설명해 주고 싶지만 어차피 자네는 이런 여유를 즐기기까지 하는 경지에 오른 듯하더군. 눈을 깜빡.

나를 한번 올려다보고는 등을 소파에 밀착시키고 양손을 가볍게 깍지껴서 자신의 단전 위에 올려놓았다.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떠서 조금 시선을 아래로 둔 채 나지막히 물었다.

이번 생은 많이 지친 것 같던데 조금 더 여유를 가져보는 건 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