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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EA/▶ 장편 소설

제2인간 암컷 타락 스토리 너무 꼴려 2편.txt[라스트 오리진 콘문학]

by 레블리첸 2021. 6. 8.

 

*본 소설은 허구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며 실제의 인물, 국가, 기관과 일절 관련이 없습니다.

또한 모바일 어플 『라스트 오리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내용이 진행이 되고 있습니다.

작중 시점은 '프로젝트 오르카:별밤의 무대' 이후입니다.

*2일차 오전 6:30

 

 

으음....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갑자기 천장의 전등에 불이 들어와서 깜짝 놀라 깨버렸다.

오르카 호는 항상 철충과 대전 중이며 듣기로는 우주 외의 세력으로부터 위협

역시 견제해야만 한다고 들었는데 아무래도 그런 연유인 모양이다.

이렇게 뜬금없이 불이 켜져 당황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군대 같다'는 인식으로

순식간에 적응해서 몸을 일으켜 눈을 비비고 있는 스스로를 돌이켜 보면 역시

나는 대한민국의 군필 남성이던 모양이다. 어쩐지 국가까지 특정할 수 있었다.

한편으로 아쉬운 점이라면 기상과 함께 뇌 기능이 회복되서 사망 전의 기억을

모두 되찾는 희망적인 전개대로 흘러가진 않았다는 부분.

기침하셨나요, 인간 님?

어제 말씀 나누셨던대로 일정을 진행하기 위해

찾아왔어요. 준비가 되셨으면 문을 열어주세요.

 

 

응? 으응! 알, 잠깐만 기다려줘!

무리 그래도 6시 30분에 기상하자마자 일과를 바로 시작한다니, 적어도 씻을

시간 정도는 주는 것이 도리가 아닌가, 여긴 인권이 도대체 어떻게 되먹은 거야!

하면서 속으로 궁시렁거리던 와중에 이 잠수함의 구성원들 절대다수가 인간이

아는 사실을 깨닫고 나도 모르게 작게 탄식을 흘려버렸다.

'로마에서는 로마의 법을 따라야 한다'는 어디서 주워들은 게 분명한 어떤 말을

상기하면서 대충 머리만 빗어넘기고 입구를 개방했다. 바이오로이드의 신체는

기본적으로 남성들에게 어필이 되어야 하는 구조이기 때문인지 피지 분비물이

적은 탓에 나름 숙면을 취했음에도 붓기나 개기름도 전혀 없는 상태였다. 무려

머릿결도 스스로 이렇게 말하긴 이상하지만 비단결과 같았다.

문 앞에는 콘스탄챠S2 모델이 치마폭 한가운데 손을 모으고 고개를 살짝 낮춘

상태에서 지긋이 눈을 감고 다소곳이 기다리고 있었다.

자, 출발하자.

 

..네.

 

 

살짜쿵 어색한 느낌을 받았다. 무언가 실수를 했나 생각하다가 설마 겨우 머릿결

정리하는 시간동안 기다리게 만들어서 언짢았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추론에까지

다다르게 되니 나도 기분이 상해서 딱히 더 말을 붙이지 않기로 했다.

콘스탄챠는 이 분위기를 읽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오늘의 일정을 설명해줬다.

일단 오전 동안에는 사령관이 전투 지휘하는 모습의 견습한다는 듯하다.

 

 

 

앗 아스널 님!

 

 

오, 콘스탄챠.

..그 옆에는 두 번째 인간이신가 보군?

 

콘스탄챠S2와 쓸데없이 기싸움을 벌이느라 미처 앞을 보지 못했다가 문득

들려온 목소리에 시선을 위로 올려보니 저만치에서 굽이 높은 구두를 신고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찰랑거리는 짙은 갈색 장발을 한 여성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그야말로 위풍당당한 자태로 걸어오고 있는 게 보였다.

아마도 바이오로이드. 그것도 나름 상위급의 개체이겠지. 콘스탄챠의 뒤에

숨어 지켜보니 아스널이라는 바이오로이드가 눈웃음을 지어 보냈다.

 

 

 

안에 든 것이 인간이라고 하지만,

아무래도 뇌파로만 대상을 특정하기보다

시력 의존도가 더 높은 나로선 인간 대우하기가

힘들 것 같군. 이해해주게나.

아, 그렇다고 사령관과 차등대우할 의도는 없다네.

어디까지나 동등한 입장에서, 알겠지?

동등한 입장이라는 것이 사령관과 나를 같이 대우한다는 것인지 아니면 이 나를

일개 바이오로이드로서 간주하겠다는 것인지 모호한 표현이고 바이오로이드의

몸을 쓰고 있는 동안만의 이야기이니 후환까지 완벽하게 제거했다. 만만하게만

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닌 모양이군.

일단은 여러모로 내키지 않는 구석이 있지만 현재 오르카 호 내에서 내 입지를

생각해서 한발 물러나기로 했다.

 

응.. 알겠..어.

맥없이 대답하자 옆에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던 콘스탄챠S2가 다시 고개를

돌려서 아스널과 독대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니 어쩐지 진 기분이 들었다.

 

딱히 내가 콘스탄챠S2에게 밀린 건 아니면서도.

 

아스널 님, 주인님과 계시다가 오는 길이시죠?

 

 

응? 아아, 기분좋게 작전을 수행하기 위한 준비를

조금 했다고 해야 할지.

아, 그러고 보니.. 오늘 경호담당은 경호실장인 것

같더군. 조심해야겠어? '블랙 리리스'라고 말하면

무슨 의미인지 알려나?

 

 

.....!!!!!

블랙 리리스라면, 그....?

초기에는 남성이 근지구력과 충성심이 월등하고 부리기에 용이하다는 이유로

여성형 바이오로이드보다 판매량이 압도적이었지만 남성 호르몬의 영향 탓에

폭주하는 일이 빈번했고 특히 자신의 주인을 모독한 건에 대해 분노를 못참고

인간을 살해해버린 모 사건 후로 남성 바이오로이드는 전면 폐기됐다.

그렇지만 과도한 충성심과 주체하지 못하는 폭력성은 일부 여성형 기체에게도

나타났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블랙 리리스이다. 그 기체도 역시 문제가 나름

많았지만 대부분 재벌가에서 경호용으로 사용되었고 부자들 중에서는 오히려

이러한 맹목적인 사랑이 플러스 요소가 되어 남성형과 달리 비호를 받을 수가

있었다고 한다. 그 블랙 리리스가 지키고 있다면, 상당히 위험할지도.

 

 

말은 안 해도 표정을 보니 이해한듯 하군.

아무리 사령관이 인간 대우를 해준다고 해도

도리에 벗어나는 언사는 주의를 하라는 말일세.

아직 아무 사건도 저지르지 않은 상태이니까

단순히 시비를 거는 것처럼 들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고 있네만, 내 진심이 전해졌음 좋겠군.

 

 

아, .....아.. 명심할게.

조언인 동시에 경고를 보내오는 아스널에게서 무언의 압박감을 느껴진다. 나를

되살린 데에는 분명 목적이 있겠지만 만일 언사가 잘못되면 즉각처분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현재 이 함내에 내 편은 아무도 없고 대응책도 없으니

머리를 조아리는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씁쓸한 현실을 자각했다.

쿡쿡, 일단 오래 살아남아야 꿈에 그리던 도원향을

맞이할 수 있는 게 아니겠나?

남자라면 이 무수한 미모의 여성들에게 둘러싸여서

주지육림의 생활을 누리는 것도 어느 정돈 기대를..

하렘이라는 말에 갑자기 눈이 번쩍 뜨이는 것 같았다. 계속해서 나 이외에도

추가적으로 인간을 만들지는 모르겠지만 만일 여기에서 입지만 다지는 것이

가능하고 더 나아가 최후까지 살아남기만 한다면 최소 개국공신급의 지위를

누리며 문장 그대로 부족함 없이 살 수 있겠지.

 

 

뭐, 부정은 못..

 

 

아스널님.

 

 

음. 조금 장난이 지나쳤군.

..하지만 콘스탄챠. 이것도 도움이 됐겠지.

콘스탄챠가 중재하며 제재하자 아스널이 금새 장난기 어린 웃음을 지워버리고

곧장 한수 접었고 나는 이 일련의 광경을 보면서 한낱 보급용품에 지나지 않는

저등급의 콘스탄챠S2 모델에게 꼬리를 내린다니 상식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음에 의아해 하는 한편, 뒤늦게 아스널의 말이 귓전을 때리며

큰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깨달아 바로 고개를 돌려 콘스탄챠S2를 봤다.

콘스탄챠는 조금 전과 같이 나를 뚫어버릴 기세로 바라보고 있었다. 말 그대로

뚫어버릴 눈빛을 했었던 콘스탄챠는 빙그레 웃으면서 표정을 바꾸더니 정면의

아스널에게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아스널은 나를 보며 씨익 미소 지었다. 하지만

어쩐지 복도의 기온이 급격히 떨어진 것만 같았다.

앞으로 철저히 말을 가리고 최대한 조심해서 황금빛 인생을 살아보려는 희망에

눈이 멀어서 끔찍한 악수를 두고 말았다는 자책과 당혹감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흐름에 따라 정신없이 복도를 걷다보니 어느새 난 함교에 통하는 문앞이었다.

내게 있어서는 마치 처형장으로 향하는 문과 같이 느껴졌고 상단에 부착되어진

전자 시계에 표시된 시간을 힐긋 보니 오전 06:42분경. 하루를 시작한지 12분에

기적적으로 되살려져 남은 내 수명을 간단한 꾀임에 걸려 쓰레기통에 처박았단

사실에 절망감에 시야가 어두워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곧 문이 열리자 보이는 광경에 마치 나는 도로 눈이 밝아지는 것 같았다.

통제실 중앙부 높은 단상의 자리에 앉아있는 사령관은 정면의 스크린을 보면서

명령을 지시하고 있었다. 화면 안에는 3D 그래픽으로 표현된 지도가 여럿 있고

큰 화면에서는 철충을 대상으로 본대가 대규모 전투를 수행 중이었으며 그밖에

대여섯 개의 출력된 화면 상에서 국지적인 총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사령관은 때로는 아래에 위치하여 실시간으로 상황을 주고 받고 있는 대원에게

내용을 전달하거나 자신이 직접 통화하면서 작전을 지시하고 있었는데 이 모든

상황이 워낙에 정신이 없기도 했기 때문에 한참동안 넋놓고서 총체를 구경하고

있었다.

...이리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관람하다가 저승사자가 부르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콘스탄챠S2는 내 팔목을 잡고 이끌어 사령관의 자리에

나를 데려다 주었다. 사령관은 내가 지근거리에 와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서

시시각각 바뀌는 화면들을 눈으로 쫓으며 본업에 집중하던 도중,

 

 

...!!

돌연히 내쪽을 바라보고는 조금 전 냉철한 눈빛은 온데간데 없이 천진난만한

아이와 같이 웃어보인 뒤 다시 고개를 돌려 화면 상에 출력된 바이오로이드에

상황 브리핑을 요청했다.

방심을 시키고 있다가 이렇게 갑자기 훅 들어오다니, 업무에 집중하는 남자의

모습과 일상적인 느낌의 갭 차이를 무기로 가장 효과적으로 심장 어택을 유도

하는 것을 보니 천상 지략가란 이런 걸 말하는 걸까 싶었다. 한편 전투 지휘는

영영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아마 2시간 정도가 더 지났던 것 같다.

자, 제2의 인간 님?

지금 보고 계신 장면에 대한 소감을 들어볼 수 있을까요?

 

 

으응??! 아.. ...아...

미, 미안.. 난 진짜 전혀 모르겠어..

대단하다는 생각밖에는 안 들어.

'바둑'처럼 바이오로이드들을 미리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큰 그림,

사실 어디까지가 큰 그림이었는지도 몰랐을 정도야.

그런 것을 쉬지도 않고 저렇게 할 수 있다니 놀라워.

갑작스러운 블랙 리리스의 접근에 너무나도 놀라버린 나는 사고를 거치지 않고

지켜봐온 장면에 대한 감흥을 솔직하게 나불거리고 말았다. 얘기는 정리되지도

않았고 나 스스로조차 '그래서 어떤 요점을 전달하려고 하려던 거지?'되묻게 된

순간에서야 비로소 황급히 침묵했다. 그리고는 나도 모르게 콘스탄챠를 향해서

고개를 돌렸다. 어쩐지 그녀의 표정은 복도에서보다 많이 풀어져 있었다.

 

... 인간 님도 충분히 숙달되면 가능하실 거예요.

 

아니! 난 진짜 무리야.

난 사령관과 달리 지휘 모듈 이런 것도 없는걸.

사령관이랑은 전혀 다른 몸이지....

 

 

주인님에게도 '지휘 모듈' 같은 건 없으세요.

내가 또 다시 횡설수설할 기미를 보이자 점점 표정이 험악해지기 시작했던 블랙

리리스가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계속 악재가 겹치는 것은 내쪽에서도 사양이니

감사히 생각하고 곧바로 입을 다물었지만,

 

 

 

에?

도저히 흉내조차 낼 수 없을 것처럼 보였던 그 사령관의 지휘가 지휘 모듈조차

착용하지 않은, 인간인 상태에서 발휘된 거란 말에 순간 잘못 들었나 의심했다.

내가 벙찐 표정을 지어도 블랙 리리스는 전혀 고양되지 않은 낯과 말로 차분히

재차 설명해나갔다.

 

 

주인님은 오리진 더스트로 강화된 인간의 몸일 뿐,

그것 말곤 큰 차이가 없으세요.

제2의 인간 님이 쓰고 있는 그 AG-1네레이드의

육신이라면 적어도 근지구력 정도는 주인님과

감히 필적할 수 있겠지만요.

 

 

에....

힐끗 눈동자를 굴려 다시 사령관이 분주하게 지시하고 있는 대형 모니터를 보았다.

수십 개의 작은 화면과 부대 물자 보급 상황, 각 전투 지역의 지도. 동시다발적으로

크고 작은 전투들을 지휘하고 있는 사령관의 옆모습이 들어왔다. 저런 것이 정말로

나랑 똑같은 인간이라고?

그후로도 2시간이 더 넘게 함교의 사령관 옆을 지키다가, 또 다른 컴패니언 소속의

경호원인 펜리르가 블랙 리리스와 교대를 마치자 나는 블랙 리리스, 콘스탄챠S2와

함께 함내 병영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은 매우 분주하고 떠들썩한 게 학교의 점심 시간과 같았는데 지휘 통제실에서

보았던 탄환이 빗발치는 전장의 장면따위 마치 영화인 것처럼 느껴질 만큼 식당은

유쾌한 웃음소리와 고음의 이야깃소리로 가득한 밝은 공간이었다.

리리스와 함께 먼저 자리에 앉아있고 콘스탄챠S2가 대신 식사를 배급 받아오기로

했기에 우리 둘은 단 한 마디 대화도 없이 조용히 마주 앉아 식판이 오기만을 그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 무언가가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껴 고갤 돌려보니,

오? 인간 님! 오늘은 저희와 함께 식사하심까?!

어??..응...

육군이라고 볼 수 있는 스틸라인 부대 이등병 등급 병사 바이오로이드 브라우니가

뜬금없이 다가와선 인사를 해왔다. 당황해서 블랙 리리스를 바라보니 블랙 리리스

역시 조금 놀란듯 했지만 곧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 없는 거겠지.

헤헷 운이 좋으시지 말임다!

오늘 중식 식단은 해물비빔소스, 고순튀, 된장찌개임다!

크으 군침이 싹돌지 말임다!

어제는 잘 주무셨슴까?

중간에 '그게 무슨 식단이야, 지금 사람 놀리냐'고 일갈하고 싶었지만 타이밍을

놓치고 말아서 계속 이 회화를 지속해 나가야하는 것인지 망설이던 난 어쩔 수

없이 최초부터 가지고 있던 의문을 해소하기로 결정했다.

 

엉... 으음, 근데, 우리.. 만난 적이 있...나?

 

엣.. 예....?

순식간에 밝은 분위기가 침체되어 버렸다. 나까지 당황해서 힐끗 블랙 리리스를

바라보니 그녀 역시 흥미로운듯이 눈을 크게 떴다가 눈을 한번 깜빡이니 다시금

침착한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어, 음.. 어제 새벽 3시쯤 화장실에 가시지 않았슴까?

그때, 불침번을 섰던 브라우니70252임다..

 

 

아, 그래..

어. 점심 맛있... 게 먹구.

 

 

예.. 인간 님도 맛있게 드십쇼..

어쩐지 울먹거리기까지 하는 것 같이 느껴지는 브라우니가 뒤돌아 서선 터덜터덜 자기의

분대원들이 있는 자리로 돌아갔다. 꼭, 내가 뭔가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렇게 불편해하고 있던 순간 브라우니가 힘이 빠진 동시에 아리송해하는 말투로 혼자서

중얼거린 말이 마치 귀에 직접 대고 말한 것처럼 귓전을 때렸다.

 

 

 

흐잉.. 인간 님은 원래 잘 기억을 못하시는 건가?

아님 역시 사령관 님이 특별하신 걸까..

황당하다고 해야 할지, 당황한 난 바로 블랙 리리스에게 항변하기 위해 그녀를

바라보았더니,

 

 

... 차차 익숙해지실 거예요.

라는 해괴한 말을 돌려받았다. 이 상황이 대관절 이치에 맞는 일인지를 묻고 싶었건만은

아무래도 핀트 자체가 전혀 맞지 않는 모양이었다. 여기에서 조금은 오해를 좀 풀어야만

하겠다는 생각에 입을 뗀 순간, 콘스탄챠가 내 앞에 식판을 내려놓았다.

...미트파이였다.

 

 

 

...주방장 님께서, 손님에겐 손님에게 걸맞는 음식을

대접해 드려야한다고 말씀하셔서요.

 

'소완'이라고 하는 최상위층의 접대를 위한 주방장 바이오로이드였던가. 언젠가

한 번쯤 내쪽에서도 보답을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아무튼 식사를 마치고 우린

은근한 시선을 받으면서 쭈뼛쭈뼛 식당을 나섰다.

*2일차 13:00

 

 

 

아, 그러고 보니 인간 님.

기억은 조금 돌아오셨나요?

 

 

....아니.. 아직도 모든 게 불분명해.

몇가지 떠오르는 키워드가 있긴 하지만..

 

 

키워드요. 한번 들려주시겠어요?

아직 내쪽에서는 가지고 있는 승부용 패가 한 장도 없는데 이쪽의 밑천을 전부

드러낸다는 것에 거부감이 느껴졌지만 일단은 달리 수가 없으니 저쪽으로부터

정보를 교환한다는 식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겠다며 스스로를 다독이고 떠오른

기억들을 통해 추측되는 몇가지를 꺼내보았다.

 

...난 나름 유복한 집안 자제였던 것 같아.

아마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군필, 아 그러니깐

군대를 전역한 남성이라는 얘기야.

...아마도 철충 중에 대검을 휘두르는 개체에게

당한 모양이야. 끝이야.

 

 

흠... 군인.. 이요.

군인이었다는 말에 어쩐지 콘스탄챠S2는 의미심장하게 말을 흐리는 거 같다.

무언가 사건이 있었던가 생각해보니 바이오로이드와 인간이 벌인 전쟁 몇 건,

특히 연합전쟁에 대한 건으로 내가 전 테러리스트나 해당 세력측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생겼다는 걱정에 급히 부정했다.

 

 

 

아! 아니..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는 특성 때문에

건장한 성인 남성은 병역의 의무를 지게 되거든.

너가.... 걱정하거나 기대하는 그런 건 없을 거야.

오르카 호 내부 분위기가 군대 같은 느낌이 있어서

그런 기억들이 떠올랐나봐.

믿을지 안 믿을지는 모르겠다. 왜냐면 나 자신의 생몰연도에 대해서는 나조차

확신이 안 가기 때문이다. 정확히 자신이 언제쯤 죽었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연합 전쟁 후냐 멸망 전쟁 전이냐를 따지는 행위가 의미가 없는데다 콘스탄챠

모델은 아마 대한민국의 세세한 사정따윈 눈곱만큼도 관심 없을 거다.

 

 

그렇다면 제2의 인간 님.

한번 AG-1네레이드 기체가 소속된 '호라이즌'의

함대를 한번 가보시겠어요?

병영 분위기로 조금 연상되었다면 그 부분에 초점을

두고 점점 영역을 넓혀가는 방식이 효율적이겠어요.

 

고맙게도 블랙 리리스가 화제를 바꿔주었다. 이 불편한 심문 분위기 속에 갇혀서

말라 죽어가느니 차라리 잠수함 바깥을 구경할 기회 삼아 나가보는 것도 썩 나쁜

일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에 덥석 물었다.

 

 

 

..그럴지도!

한번 잠수함 바깥을 구경해보긴 해야지.

 

콘스탄챠S2가 작게 한숨 쉬고 블랙 리리스에게 원망의 눈빛을 보내는 것 같았다.

블랙 리리스는 멋쩍게 미소 지으며 '빨리 해결되면 좋잖아요. 주인님께서도 그걸

바라셨구요.'라면서 변명했다. 블랙 리리스 기체가 콘스탄챠S2에게 변명을 한다.

그런 진귀한 장면을 눈으로 직접 보게 되는 날이 오게 될 줄이야.

아무튼 나와 대원들이 오르카 호를 나가서 잠수정을 배정 받아 호라이즌의 함대,

그 중에서도 '무적의 용'이라는 다소 웃긴 이름의 지휘관인 바이오로이드가 있는

본함으로 가기 위한 서류 작성과 인증 절차를 진행하고서 바쁜 사령관의 허가를

나타내는 날인이 서명된 서류가 돌아오고 나서야 우리는 이를 접수처에 보인 뒤

호라이즌 본함으로 출발할 수 있었다.

*2일차 15:00 호라이즌 본함 함장실

우리는 일단 무적의 용을 찾아갔다. 어째선지 심장 박동 소리가 커지는 것 같다.

아마 부활 후 처음으로 해저를 벗어나 햇살을 봐서 설렌 탓일까. 어쩐지 익숙한

함내의 복도를 나도 모르게 앞장 서 걸으며 무적의 용이 있는 함장실의 문 앞에

섰고 곧 문이 열리자 얼굴 위로 쏟아지는 햇살에 눈을 찌푸렸다.

햇빛에 눈을 질끈 감아 고개를 돌린 후에, 다시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정면에

향하니 심해와도 같이 검푸른색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넘겨 백사장과 같이 희고

아름다운 이마를 환히 드러내고 날카로운 턱선 바로 아래까지 단추를 단단히도

여매 빈틈이라곤 하나 없어 보이는 한 명의 여장부가 양손을 포갠 채 책상 위에

올려두고 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반갑소. 함대의 총지휘를 맡고 있는 용이라 하오.

..귀관은 본래 인간... 이라고 들었네만.

 

앗....에... 응.

수육한 본체가 AG-1네레이드, 즉 본래 호라이즌의 소속이기 때문일까 부대의

최고위 개체인 무적의 용 앞에 있으니 자꾸만 전신의 근육이 수축될 것 같았다.

자꾸만 본래 인간인 내가, 존댓말을 꺼내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렇지만 동시에 전혀 낯설지가 않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본래 대한민국 군인

출신이라서 대한민국에서 제조된 바이오로이드인 무적의 용이 친숙한 것인가.

본의 아니게 대화가 단숨에 끝나버리자 무적의 용은, 줄여서 무용은 난감해할

법도 했는데 불구하고 차분히 말을 이어갔다.

 

.... 본함은 일단 철충으로부터는 안전하다고 볼 수 있소.

때문에 사령관도 이 방문을 승인해줬지.

네레이드의 육신을 취하고 있다하나 중장비의

취급법도, 제식도 모르는 그대는 그저 내방자일 뿐.

본함의 대원들도 일단은 그대를 식별하고 대우는

할 것이오. 안내는 내 부관이 맡을 것이오.

 

무용이 직접 인솔해주지 않는다는 것에 어쩐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렇지만

'내방자'에 지나지 않는 현 상태에선 아무런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그걸 떠올리니

어쩐지 가슴을 옥죄는 것처럼 답답한 기분마저 들었다.

안녕하세요 인간 님.

세이렌이라고 해요.

...일단 체육관이라도 한번 가보실까요?

 

 

그래.

함대의 부관 세이렌이 다가와 정중한 손짓으로 출입문으로 유도했고 나는

내키지 않아 고개를 마지못해 돌리며 곧장 문을 열고 머뭇거리며 바깥으로

나섰다. 석연치 않은 마음을 달래며 눈을 감고 복도로 한 발자국 내딛은 그

순간 복도를 달려오던 누군가와 부딪히고 말았다.

 

 

아앗..... 괜찮...

 

....이, 이런.. 용의 본함이라는 이유로 방심을..

안내역을 맡은 세이렌는 심히 놀란 듯하고 블랙 리리스는 자책성 발언을 흘렸다.

콘스탄챠S2도 놀라서 눈을 꿈뻑거렸다. 나는 고개를 내려, 내 품에 부닥친 것이

무엇인지 확인해 보았다.

 

 

아얏! 아- 네리네..리..

가 아니라, 인간 님이구나?! 꺄핫!

명찰표 너~무 귀엽다! 공지를 듣긴 했어!

 

 

... 주인님과는 다른 분이시니 예의를...

 

소악마를 연상케 하는 짖궂은 장난꾸러기 미소를 띈 바이오로이드가 활기찬

목소리로 아는 척하면서 살갑게 굴어왔고 조용하게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던

콘스탄챠S2가 마치 어머니가 자식을 타이르듯 테티스를 중재하려 했다.

그리고 이때 갑자기, 세이렌과 테티스 모두 처음 보는 바이오로이드일텐데도

낯설지 않으며 오히려 친숙하고 그 종명까지 알고 있는 자신에게 소스라치게

놀랐다.

 

테티스, 맞지...?

 

 

으응? 테티스 맞는데~?

 

 

흠..? 테티스는 흔한 기체가 아니라 민간인은 물론,

일반 육군 출신이었으면 생소할텐데...

 

의외로 날카롭다고 해야 할지. 콘스탄챠S2는 이 사소한 대화에서조차 내가

깨달았던 것을 포착했고 금새 의문을 품었다. 입밖으로 내지 않고 조용하게

넘어갔다가 자연스레 호라이즌 배속을 요청했었다면 미래가 바뀌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단 생각에 조금 뼈 아프지만 조금 전 '군인 논란'도 있고, 여기선

발 빠르게 먼저 인정해서 그녀의 걱정을 덜어주는 게 이득일 것 같았다.

 

 

 

어쩌면 난 해군 ...출신이었을지도 몰라.

 

호오. 그렇다면 얘기를 더 들어봐야겠군.

천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용이 다시 나를 향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으니.

갑자기 처졌던 어깨가 마사지라도 받은 것처러 가볍게 느껴졌다.

 

 

 

흐응? 부딪히기만 했을 뿐인데 한건 올린 느낌?

테티스가 말한 그대로, 이것은 분명 오르카 호의 모두에게 도움이 되었을 뿐만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내게도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 그야말로 운명적인 느낌.

 

 

 

..........

.....잘했어요.

 

물론 내 에스코트를 맡자마자 그르쳤다는 점과 테티스의 천방지축과도 같은

행동에 애를 먹은 세이렌은 아주 할 말이 많아보였는데 그것들을 꾹 삼킨 채

겨우 넘겨버린 것처럼 보였다. 왜냐하면 이 함장실이 있는 복도에서는.

 

.... '복도에서는 정숙할 것.'

용.... 에게서 들었던 말이야.

용의 눈이 가늘어졌다. 나를 보는 그녀의 눈빛이 일순간 반짝거린 것 같았다.

오싹함이 느껴졌다. 기분 좋은 짜릿함에서 기인한 감정이었다.

 

 

 

내게, 직접 말이오?

.... 나의 함대는 격침된 적이 없소만.

연결체는 물론 일개 철충이 이 배 위에

그림자를 드리우지도 못했소.

..'휩노스 병'으로 쓰러졌다기엔....

 

 

아직 모든 기억은 불분명하다고 하셨어요.

'자신의' 기억인지조차도요...

 

내가 아마도 철충 상위 개체인 연결체가 휘두른 날붙이에 당해 죽은 것 같다.

대한민국 군인 출신이었던 것 같다 등의 단편적 추측성 정보도 이미 전부 다

전달이 되었던 모양이다. 오르카 호의 정보 전달 속도가 무시무시하군.

 

 

 

하선한 인원들.. 이 있다면 한번 목록을 볼까요?

어쩌면 어떤 사건으로 배에서 내린 후 철충에

습격을 받았던 걸지도요.

 

 

일리가 있소. ....아무래도 소관은 바이오로이드이고

연합 해군 지휘관의 보직을 수행하면서 초기에는

많은 '말썽'들이 있었으니 말이오.

...군사 보안문서이지만 특별히 열람을 허가하겠소.

 

 

예. 총 4건의 문서 출력을 마쳤습니다.

 

부지불식간에 어떠한 공정이 완료된 모양이다. 세이렌이 총총 걸음으로 다가와

패널을 한대 건넸다. 받아서 보니 바탕화면에는 4개의 문서가 있었다.

 

 

 

그럼 시간이 날 때 읽어보고 폐기는 콘스탄챠를

통해 진행해주시길 바라오.

 

여기까지 왔으면 더이상 잔류를 요청할 수도 없다. 지금은 아쉽지만 무용과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더 나눌 수 있었고 조금이라도 더 오래 볼 수 있었다는

사실에 만족하고 돌아가야겠다. 언젠가 또 올 수 있길 바라며.

그렇게 생각하며 깔끔히 단념했을 때 또 다시 한번 기적이 일어났다.

 

 

 

아, 무적의 용 님?

주인님께서 내일 회의를 오늘로 앞당기자고..

 

 

?! 서바.. 아니, 사령관의 요청이라면

언제든, 뭐든 허가하지. 그, 그럼 나도 같이..

 

무적의 용의 안면 근육이 일하고 있다. 대리암을 깎아서 석조한 바이오로이드인가

생각했었던 그 무적의 용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고 언제나 차갑게 잠겨있던 눈이

마치 오전 중에 당황해서 횡설수설하던 시절의 나처럼 시선을 고정하지 못한 채로

지진이 발생한 지역의 유리병처럼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책상 위의 양손이 그녀의 심정을 대변하듯 어쩔 줄 몰라하며 서로의 손가락 마디를

번갈아가며 문질거리고 있었다. 이러한 모습을 콘스탄챠S2가 귀여운 아이를 보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나지막히 말했다.

 

 

후훗 예. ..흔한 기회는 아니니까요. 

 

 

...

 

 

왠지 심한 위화감과 함께 역한 감정이 들었다. 내 마음 속의 우상이 더럽혀진 듯

부정하고 싶은 모습을 직접 목도하고 있자니 어서 이 괴로운 현실에서 눈돌리고

싶은 기분이 드는 동시에 그 누구에게도 흐트러진 모습따위는 보여줄 것 같지가

않았던, 목석 같고 늠름하던, 그 용이 마치 사랑에 빠져서 안달이 나는 소녀처럼

애달픈 마음을 억누르지 못해 괴로워하면서도 기뻐하는 저 모습이 너무 낯설어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블랙 리리스가 불쑥 다가와서 용무가 끝났으니 급히 돌아가자고 재촉해 드디어

정신을 차리고 다같이 잠수정에 올랐다. 무적의 용은 오르카 호로 가는 길 내내

창밖에서 한시도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고 나는 정면에 앉아있는 콘스탄챠와

옆에 있는 블랙 리리스는 아랑곳도 않고 창에 비친 무적의 용을 보고 있었다.

 

용의 입꼬리는 경련을 일으키기라도 한듯 움찔거리고 있었고 마치 눈은 낭군을

그리고 있는 것만 같아 보였다. 단정하게 모은 두 무릎 위에 올라간 포갠 주먹이

순백의 치마 위에 선명한 주름을 새겨놓았으며 그녀의 골반은 미세하게 좌우로

움직이고 있었다. 어쩐지 그 꼴이 보기 싫어 건네 받았던 패널을 작동시켜 징계

문서를 읽으려는 찰나

 

 

... 아, 징계 문서는.. 가급적 오늘 소등 전에

읽어줬으면 좋겠군. 나와 관련된 건이 많으니

아무래도 당사자와 함께 있기 거북할 것이오.

 

 

으, 으응. 알겠.. 스어.

 

가증스러운 무적의 용은 나에게만 항상 보여주던 그 얼음장 같은 표정으로 돌아와

경고를 해서 오르카 호로 돌아가는 1시간 여 동안에 무적의 용이 달콤한 꿈을 꾸는

동안 나 혼자만 심해 속의 고철에 갇혀 끔찍한 침묵이라는 고문을 받도록 만들었다.

복귀했을 때에는 18시. 나는 무적의 용, 블랙 리리스, 콘스탄챠S2와 함께 사령관이

있는 함교로 복귀했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