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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ary/▶ 아무 얘기

유언장 (20210929)

by 레블리첸 2021. 9. 29.

 

 

 

 

제가 자살이든 타살이든 죽으면 제가 가진 모든 자산은 임준현이 사용할 수 있게 해주세요. 제가

사망한 시점에서 신한은행과 우리은행을 비롯 모든 은행 잔고의 총액을 합한 액수만큼 임준현이

아무런 부담 없이 사용할 수 있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임준현에 의해 목숨을 잃었을 경우

그에게 책임을 물지 않고 앞서 작성한 계약 내용대로 이행해주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제가 부양해야 하는 가족이 있을 경우에 위 내용은 유효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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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녀석이랑 살고 있는데 현재 살고 있는 집 화장실 바닥이 심히 미끄러워서 몇번이나 넘어져

크게 다칠 뻔했다. 잘못 넘어져 머리 부딪히면 바로 황천길 직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라 혹여나

내가 넘어져서 거품 물고 쓰러지면 친구 녀석에게 119에 신고하지 말고 죽을 때까지 기다리고서

더이상 호흡을 하지 않는 게 확인되면 그후 30분 후에 119에 신고해달라고 부탁했다.

산다는 건 괴로운 일이고, 목숨을 잃을 기회가 찾아왔으면 붙잡아야 한다. 괜한 동정심으로 일을

그르치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두었다. 언젠가는 현장에서 궂은 업무들을 도맡기 때문에 가끔씩은

무언가 운이 따르지 않아서 목숨을 잃게 될지도 모른단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되면 내가 그동안

고생해서 모든 돈은 결국 어떻게 되겠나 생각해보니까 차라리 친구 녀석이 알뜰살뜰히 사용하는

편이 그나마 마음이 편하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늦은 나이에 복학까지 하고 학기중이나 방학중에도 꾸준히 노가다를 뛰는 한편 재택근무까지 약

2개까지 해가면서 열심히 사는 이유는 죽을 수는 없으므로 잘 살기 위한 발버둥에 지나지 않는다.

 

죽으면 모두 무용지물인데 어쩌면 그 상태가 내가 가장 바라는 형태일지도 모른다. 사는 게 너무

지치고 의미를 못느껴서. 언젠가 글을 적었는데 생명체들은 기본적으로 번식하는 것이 목적이다.

인간만이 가죽을 남기는 데에 의미를 느끼는 별난 생물이다. 허나, 가죽보다는 가족을 남기는 게

훨씬 유의미한 일이다. 죽으면 만사가 당신에게 무용지물인데 가죽이 남으면 무얼 하나?

딱히 세상에 자랑스럽게 내놓을 만한 가죽을 만들진 못했으나 적어도 친구가 복권의 2등 정도는

당첨되었다 생각될 만한 돈은 벌었으니 이 누추한 가죽이라도 친구의 미래를 위해서 남겨야겠다.

기왕이면 내 친구도 이런 나에게 감화 받아서 사망하면 가까운 친구에게 전재산을 양도해준다면

좋겠군.

최근 연애도 안 하고 결혼도 포기한 청춘들이 많다. 그런 청춘들이 인생에 의미를 찾지 못한 채로

무작정 미래를 위해 돈만 벌고 있다. 그런 친구들이 맞이할 종착 역의 비슷한 형태를 이미 보았지.

노가다판과 고시원을 전전하면서 가족 없이 지금 당장과 어쩌면 미래를 위해 계속 돈만 모으다가

고독사하는 사람들은 많이도 봐왔다. 그렇게 열심히 모은 재산들은 노잣돈으로도 못쓴다. 어차피

죽으면 뒤에 남은 세상일엔 미련따위 느끼지도 못할테니 떠난 사람 걱정은 할 필요조차 없겠지만

남은 사람은 미련하게도 대신 안타까워 하며 혀를 차게 되더라.

부디 내가 남길 가죽은 남겨진 사람에게 남겨져서 누군가를 대신 안타깝게 만들지 않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