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유명한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작품의 영향으로 고시원 살이의 이미지가 더욱 나락으로 떨어지기는 했지만
개인적으로 고시원에서 살 때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서로 많이 의지도 했었서인지 너다섯 군데 거쳐간 모든
고시원에는 좋은 기억들밖에 남아있지 않다. 그중에서도 제법 오랫동안 시간을 함께 보냈었던 사람은 간편하게
'사장님'이라 불렀던 노인이 인상에 남아 오늘은 이 분에 대해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사장님은 젊은 시절 대한민국 공군에서 장교로 복무하다가 대령 진급 후 전역하신 분이었다. 시스템에 대해서는
자세히 모르겠지만 퇴직 연금을 다달이 받지 않고 한꺼번에 전부 받을 수 있는 모양인데 아무튼 그 퇴직연금으로
기반을 삼아 자신만의 사업을 펼쳤지만 유감스럽게도 실패, 결국 이혼하고 고시원까지 도망쳐 온 분이었다. 과연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데 그런 데를 파고들 마음은 없고 만일 누군가 사장님이 뭐하던 분이냐
묻는다면 난 위처럼 내가 아는대로 알려줄 것이다.
https://blog.naver.com/ravlitzen/221803120293
사장님은 1946년생으로 76세이신 것치곤 나름 정정하셨고 오히려 기운이 너무 넘쳐 식당에서 함께 밥을 먹을 때
자꾸만 여종업원분에게 호통을 치시니 부탁이니 부드러운 톤으로 조금 조용히 말씀하시라 조언을 드릴 정도였다.
내가 워낙 베풀면서 손해보기를 좋아하는 성격이라 가끔 모시고 사진처럼 모셔가서 식사를 하기도 했고 컴퓨터를
잘 다룰 줄 못하시는데 국방부와 어떤 계약을 맺고 대리 입찰 사업을 작게 하시기에 관련 전산 업무를 도와드리곤
했는데 때문인지 나에게 굉장히 많이 마음을 여셨던 모양이다.
아들 같은 놈이라고 주변에서 둘이서 하도 붙어다니니 어떠한 관계냐 상인이나 이웃분이 물어올 때면 말씀하셨고
당시 이혼 소송 중에 계셨는데 승소하면 적어도 4억 정도 받게 될 듯한데 당신은 나이도 있고 다 못쓰고 죽을 테니
내 남은 대학 등록금 내주고 그 절반은 가지라 하셨을 정도셨다. 그 대신 당신을 모시고 복층 오피스텔에 들어가서
함께 살자고 하셨던가.
https://blog.naver.com/ravlitzen/221267558810
https://blog.naver.com/ravlitzen/221446558521
https://blog.naver.com/ravlitzen/221847469425
2018년부터 2020년초까지. 시간은 쏜살 같이 지나가더군. 두 번 퇴사를 거치고 어느새 나는 멀게만 느꼈던
4학년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이혼 소송은 끝이 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사장님은 점점 궁핍해져만 가셨고
내게 경제적으로도 많이 의지하게 되셨다. 더 자세한 사정을 들어보니 휴대폰 요금도 한참 밀려있는데다가
사실상 신용불량자 신세였다. 그것까지 자비를 들여 해결해드리려 했지만 어차피 곧 승소하면 돈의 힘으로
해결이 될 터이니 두고 보자고 말씀을 드렸다. 행정 업무도 어려워하시기에 도왔더니 동사무소에서는 내게
이 분 관련해 대신 연락을 취할 정도였으니.
그러다가 길보가 있었다. 드디어 길고 길었던 법적공방이 승리로 끝났다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담당 변호사
양반이 욕심이 났던 모양인지 돈을 더 받아낼 수 있으니 조금만 여유롭게 가보자고 제안을 해왔다고 하더라.
지금은 볼 수 없지만 법원 홈페이지에서 판결문을 보니 대략 9억원 정도를 받게 되는데 변호사에게는 그 중
절반을 주겠다 약속하셨던 거다. 변호사 입장에서는 상대 측에게서 돈을 더 뜯어낼 수록 이득이니 어떻게든
더 끌어가고 싶었던 셈. 하지만 사장님은 2년 사이에 금새 많이 노쇠해지셨고 내게 이제 그만두고 싶단 말을
하셨다. 나도 그만두고 싶다면 이제 족함을 알고 타협하시라 말했는데, 변호사 양반은 결국 의뢰인의 요청을
무시하고 강행을 해버렸다.
이제 골치 아픈 일이 다 끝났고 즐기면서 노년을 보내는 일만 남았다는 기대감에 젖어있다가 판결이 또 다시
미루어졌다는 소식에 마치 세이브 데이터 없이 모든 재화를 쏟아부어 겨우 보스 몬스터를 잡으니 2페이즈가
개시되는 것을 본 게이머처럼 사장님의 얼굴에 깊은 절망이 드리웠다. 그후로는 정말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바뀌어 식음을 전폐하셨다. 그저 매일 저녁 내 방에 와서 바뀔 리가 없는 선고문 전자 문서를 본 뒤
터덜터덜 돌아갈 뿐이었다.
끝까지 보살펴드릴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나도 그럴 여력은 없었다. 고시원을 나가고 원룸 계약해서 혼자서
살아가기 위해 제대로 수행을 할 필요가 있었다. 빌려드렸던 12만원은 차차 갚으시라고 기별 드리고 떠났다.
그로부터 대략 2개월이 지났는데 전화가 한 통 왔다. 빌려준 돈 갚을테니 얼굴 한번 보러 오라는 내용이었다.
솔직히 차라리 노가다나 뛰는 게 훨씬 영양가 있는 시간이긴 했지만 일단 찾아가 뵈었고 10만원을 받아내고
남은 돈 2만원은 천천히 갚으시라, 기말고사 기간이라 먼저 가보겠다 하고 작별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고시원의 다른 이웃분의 전언에 따르면 화장실 변기 위에 앉아 온수를 맞으며 잠들듯 숨을 거두셨다고 한다.
다 이긴 법적공방은 이로써 물거품이 되었고 변호사 양반은 욕심 때문에 온전히 3년의 시간을 날려버리셨다.
사장님의 장례는 무연고자로서 공공기관이 알아서 처리한 모양이다. 그래도 나름은 호상이시니 다행이지.
길몽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만 어느날 꿈 속에서 이희갑 사장님을 뵈었다. 그 고시원 그 방에서 환히 웃으며
나에게 덕담을 해주시더군. 어떤 내용인지 기억은 안 나지만 덕담이었다. 사장님은 자기 방에서 필요한 것이
있으면 가져가라고 말씀하셨고 원래 남의 물건은 잘 안 받는 성격이라 사양하다가 아마 휴지 한 개 챙겨갔던
것 같다. '괜찮고 이거 하나만 쓸게요. 쉬세요.'하고 마지막처럼 간결한 인사만 남기고 방을 나서며 깼다.
이제는 연이 얽혀도 이승에서 다시 뵐 일은 없겠구나. 같이 밥 먹고 산책하던 시간이 어쩐지 그립게 느껴지긴
한다. 그래도 워낙 호방하고 금방 상황을 이해하는 분이셨으니 이승에서 길 잃고 헤맬 일은 없으시겠지. 그저
안녕히 가시라고. 4년 가까이 내게 찾아와서 심심해서 죽겠다 토로하실 때 당신이 살았던 흔적을 일기로라도
남겨보시는 게 어떠냐 제안했지만 끝끝내 거절하셨지만 적어도 사장님의 족적은 내 일기에 남으셨다. 전해질
일이 없는 위로를 하면서 어쩐지 먹먹해진 내게 위로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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