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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ary/▶ 아무 얘기

네가 싫어요

by 레블리첸 2022. 9. 18.

 

 

 

 

 

원인은 모르겠지만 내가 싫다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 나에게 물리적이지는 않으나 직접적으로 싫다고 의사를

표현했다. 원인을 말해주면 알겠지만 이유 없이 내가 싫다고 하니 원인은 모를 수밖에 없다. 간혹 그렇기도 하지.

말투나 문장, 행동, 외형 등 누군가를 구성하는 어떠한 속성이 원인불명으로 거슬리는 경우가 있다. 왠지 모르게

잘난척을 하고 있는 것 같은 내 글의 문장이 고깝게 들리는 사람도 있고. 실제로 너무 많은 부연설명을 덧붙이다

보니 횡설수설하게 되는 나의 해명 또는 지나치게 함축하여 단답하여 오히려 상황 파악에 악영향을 미치는 나의

말투가 거슬리기도 하겠지. 어쩌면 정상인의 사고 범주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나의 행동이라던가.

생판 모르는 타인 5명이 있으면 그중에 둘은 나를 이유 없이 싫어하고 다른 두명은 나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으며

오직 한명만이 나를 이유 없이 좋아한다고 하던가. 해당 배율에 대해서 정확하진 않지만 아무튼 요지는 세상에는

당신처럼 이유 없이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라는 거겠지. 스스로 왜 그런지 모르겠다 말하는데 아마도

자연스러운 일이며 우리가 서로 실제로 마주하고 관계가 생길 가능성은 무한히 0에 수렴하니 나 같은 건 잘 잊고

본인 인생 사시면 되겠다. 만약 물리적으로 가까운 거리에 위치했다면 당신과 나 둘중에서 못버틴 사람이 떠나는

사회적 데스 매치가 행해지면 그만인 일.

당신이 저지른 어떠한 과오 때문에 네가 싫어요. 지난날 나의 치기에 의한 우행으로 비롯하여 증오한다는 사람이

있다. 어떤 해답이나 개선을 해줄 것처럼 위에서 작성했지만 아마 바뀔 일은 없을 거다. 정확히 짚어준 건 고맙긴

하지만 현상태가 유지되거나 완만한 곡선을 그리면서 고쳐나가게 될 거다. 당신이 본 것이 결국 나의 본성이거든.

본성은 하루 아침만에 뜯어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몽둥이질이라도 하면 트라우마와 함께 수정할 수 있겠지만

오늘날 과연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토록 싫어하는 이를 위해 그런 수고를 들이며 위험을 감수할 사람이

있을까? 싫으면 먼저 선 긋고 관계를 끊으면 그만인 일이다. 그토록 혐오하는 대상이 잘못을 저질러놓고 잘 살고

있는 모습이 아니곱겠지. 그럼 죽이지 그러냐.

당신 세상에서 내가 불구대천의 원수이며 세상 모든 악이라면 그 대상을 절멸하지 않고 묵시하는 것이 정의롭다

말할 수 있을까? 용서하지 못할 악마 자체라면 나로 인하여 화를 당할지도 모를 무구한 이웃들을 위해서 희생을

감수할 용기가 없는 겁쟁이 당신 또한 그토록 혐오하는 나와 같은 족속이다. 악은 회개할 수 없으니 멸할 수밖에

없다. 부디 정의의 철퇴를 내려줘. 그것만이 당신 세상을 구원할 유일한 길이다.

그때 왜 그랬느냐고 시시비비를 가리려고 할 때 나는 순진무구하게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고 대답했다. 상대를

도발하기 위해 지어낸 말이 아니다. 순수한 진심에서 우러나온 거짓 없는 답이다. 내게 있어 당신은 어떤 존재냐

물어왔을 때 나는 한치의 망설임 없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답했다. 상대를 깎아내리기 위한 말이 아니다. 내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다만 난 여태까지 타인을 내가 알고 있는 방식대로 대했고 때로는 단순히

마음이 가는대로 다루었을 뿐이다. 내 모든 행동에 의미를 부여한 건 내가 아니라 당신이잖아.

특별히 아무런 생각없이 정을 주고 특별히 아무런 기대 없이 선의를 베푼다. 때로는 아무런 악의 없이 악행까지

저지르지. 객관적인 의미에서 악행이라는 뜻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쪽이 주관적으로 판단했을 때 악행이란 점을

잊어버리시면 곤란한데 만약 객관적인 악행이었다면 적법한 절차를 통해 고소를 진행하면 될 일이다. 신고하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히 받아들인 자의 주관에 의한 악이라는 반증이다. 여기까지 설명해줬으면 이제 생각해야지.

순수악이란 바로 이런 사람을 가리키는 거라고.

사람이 참 선하다는 말과 사람이 참 비정하다는 말을 한 사람에게서 동시에 듣는다. 인연이 끊어질 때마다 매번

당신에게 있어 나란 존재는 도대체 무엇이었냐는 질문을 받는다. 흔히 있는 일이다. 타인을 누구보다 신경쓰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지만 타인은 나에게는 결국 아무런 것도 아니다. 기본적으로 30살인 지금 누군가를 만나게

되면 당신과 다시 만나려면 최소 30년 또는 그 이상이 소요될 거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그러니 어떻게 남에게

애착을 가질 수 있겠어. 당신이 내게 호감을 가졌을 만한 요소는 전부 의미가 없었고. 당신이 내게 호감을 가진

깊이만큼 당신이 멋대로 품은 믿음이 배반 당한 순간 증오심으로 바뀌었으리라 생각한다.

근데 그게 끝. 나는 그렇게 판단했다. 아마도 이건 절대로 고칠 수가 없겠지. 행동은 교정이 가능해도 영혼이나

마음은 고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 이제 내쪽에서 뭔가 조치를 취할 수 있는 방안은 없으니 남은 답은 당신이

찾을 차례다. 나를 죽여서 세상에서 없애거나 서로 물리적 거리를 최대한 벌려서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살거나.

증오와 애정은 종이 한장 차이라고 한다. 당연히 계속 내게 관심이 생기고 일거수일투족이 눈에 다 거슬리겠지.

나를 못죽이겠다면 부디 본인 마음부터 죽이시면 좋겠다. 나를 위해 하는 말이 아니라 늘 그래왔듯이 선의에서

비롯된 당신 위한 조언이야. 당신이 환멸을 느낀 정이나 특별한 의미없이 건넨 선의의 조언.

내게 당신 비롯한 모든 타인은 의미가 없기 때문에 결국 당신의 부르짖음은 아무 의미없이 허공에 흩날리는데

아무런 의미없는 나의 모든 행동이 당신에게 전부 유효한 치명타가 된다니 이 얼마나 딱한 비극이야.

네가 싫어요. 그 말을 들었을 때 상처 받았던 건 사실이다. 근데 어쩌라는 건지. 그쪽이 날 싫어하는 이유는 잘

알았지만 그쪽이 날 싫어한다는 것을 알았다는 결과에서 더 발전되는 일은 없다. 왜 싫은지 물을 필요도 전혀

못느꼈다. 웬만한 이유는 스스로 잘 알고 있어. 그걸 알고도 못고치고 안 고치고 있는 것인즉슨 순수악이란다.

그럼 죽이시던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