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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ary/▶ 아무 얘기

정체

by 레블리첸 2022. 10. 10.

 

 

 

 

요즘 뭐해라는 질문이 따갑다. 요즘 뭐하냐고 묻는다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다고 대답해야 하는데 이걸

솔직하게 말하기가 꺼려지기 때문이다. 차고 넘치는 시간적 여유가 주어졌을 때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저

허송세월하는 부류의 인간을 혐오하는데 정작 내가 그들과 한통속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이다.

실제로도 눈에 보여지는 성과를 낼만한 일따위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런 사실을 망각하고 싶기 때문에

안부를 묻는 가벼운 인사조차 무겁게 여기고 만다.

변명거리는 참 많았지. 3개월 정도는 최근에 입사한 회사의 분위기와 업무에 적응한다고 정신 없었다면서,

그 이후로는 고시원으로 이사하고서 작업 환경을 개선한다면서, 와식 생활로 바꾸었더니 소화불량이기에

두통이 심하다며. 영악하게도 그 전부 유효해서 아무도 내가 탱자탱자 놀면서 주말에 낮잠이나 자는 그런

한심한 짓거리를 일삼고 있음에도 비난하지 못했다. 모르거나 사실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관심 없어 그런

거겠지만.

항상 바쁜 척 떠들고 다녔지만 내 정체는 사실 한량이야. 누워서 남이 하는 게임 영상이나 야한 것을 보며

거시기나 조물딱거리다가 잠들고 깨기를 반복하는 폐인이지. 청수처럼 보였겠지만 정체된 고인물이란다.

회사와 학교는 누구나 다니고 있는 것이기에 따라서 당연히 일과가 있고 할당해줘야 하는 시간이 끝나면

여가 시간이 생기는 것은 당연지사지. 호수 위 고고한 학처럼 보였겠지만 사실 담수 위에 갇혀 죽을 날만

기다리는 백무문 비단잉어야.

 

 

 

 

회사가 끝나고 돌아오면 19시인데 집안 청소는 월요일, 수요일, 금요일에만 하고 빨래는 1주일에 한번

목요일이나 화요일에 하니까 빈말이 아닌 참말로 많은 시간이 남는다. 하지만 아무 것도 안 해. 여전히

갇혀있어 반복하는 변명을 되풀이하자면 작업 환경이, 책상이 고정되어 버렸기에 낮은 침대에 허리를

굽힌 채 앉아 일기를 쓰고 나면 척추에 금이 갔던 영향인지 피로도가 급격히 쌓여 눕고 싶어지고 결국

몸을 뉘우면 작업 환경 개선을 위한 장치나 대안을 모색하다가 잠들지.

눈을 뜨면 다시 회사 가고. 돌아와서 일기 쓰고. 일기 쓰고 나면 피곤해서 뻗어버리고. 악순환 그 자체.

바로 지금 나름대로의 묘안이랍시고 꺼내놓은 게 모니터로 사용중인 갤럭시탭S8플러스를 높이 띄워

와식 생활에서 입식 생활로 바꾼 것이다. 하지만 서 있으면 그만큼 체력이 빨리 소모되고 집중하기도

어려워지지. 소화불량의 해결을 위한 대안이라고 생각한다면 아슬아슬하게 합격점은 넘긴 듯하지만

편하게 작업할 수 있고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가를 따져보면 여전히 불합격이다.

모든 게 내 부족함과 게으른 천성 탓이다. 가로막는 건 아무 것도 없는데 그저 언젠가 물길이 트이지

않을까 막연한 기대를 하며 말라가는 물 속에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다. 내가 상어면 진즉 죽었을 걸.

한낱 민물고기에 지나지 않는 범부라서 그런 점에서는 다행이라고 여기고 있어. 대단한 사람이라고

여기고 있는 사람에게 찬물 끼얹어 미안하지만 이게 내 정체다. 신비주의라며 가면을 쓴 채 살던 때

사람들을 집어삼킨 나의 환상이 오히려 나를 괴롭히는 환상통이 되고, 그 괴리에 괴로워 진짜 내 날

것의 모습을 서서히 드러내기 시작했는데도 여전히 콩깍지는 벗겨지지 않았나 봐.

학교에서부터 이미 흐르지 않는 물은 썩는다고 가르쳐줬다. 역사서에서조차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흐르지 않는 것까지는 사실 용서받을 수 있다. 하지만 진정한 죄악이며 최악인 점은 정체된 원인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것을 본격적으로 해소하지 않고 오히려 온갖 변명거리를 가져다가 기워가면서

자신을 합리화하는 비겁한 행동이다.

이게 나야. 구제할 방법이 없는 썩어빠진 잉여 인간이지. 머잖아 겨울인지 여름인지 혹독한 계절이

평등하게 고통을 가져올텐데 이 사실을 알면서도 전혀 대비하지 않아. 오히려 아무 책임이 없어서

다행이라며 안도하고 있는 자신. 주변의 생물보다 조금 덩치가 크고 힘이 세다는 이유로 나까지는

여전히 괜찮겠지 빈약한 낙천스러움으로 겨우 눈을 가리고 있는. 거짓 안빈낙도의 삶을 영위하고

있는 담수 안의 멍청한 잉어.

언젠가 길을 걷다 문득 겨우 동네 목욕탕의 온탕 남짓한 크기의 담수에 갇힌 한 잉어를 발견했다.

씁쓸한 마음이 들어 미소로 미리 그의 죽음을 배웅했다. 넌 곧 죽겠구나. 그게 곧 나인 줄 모르고.

녀석은 죽어서 그 지대의 양분이라도 되어주련만 나란 놈은 과연 죽은 후 어떤 도움이나 될런지.

한낱 미물 취급 받는 잉어가 잉여 인간보단 나은 셈이구나.

조금 정신이 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