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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ary/▶ 아무 얘기

인망

by 레블리첸 2022. 10. 3.

 

 

 

 

 

고시원에 산다고 하면 다들 걱정을 많이 해주는데 그럴 필요 없다. 사람마다 선호하는 라이프 스타일이

다르듯이, 누군가에게는 타인과 주방과 욕실, 화장실을 공유하여 써야 하고 내 집에서조차 내 마음대로

고성방가를 할 수 없다는 게 지옥 같은 삶일지 몰라도. 아니, 근데 이건 솔직히 조금 불편한데 나름대로

이정도를 '조금 불편하다' 정도로 표현할 수 있다는 데에서 이미 개개인의 격차가 있는 셈이다. 내 친구

중에 한명은 고시원을 보자마자 이런 데에서 어떻게 사느냐며 기겁했지만 이해가 안 되더군.

평범한 원룸 월세랑 비교하면 큰 차이가 없기 때문에 자유도를 중시한다면 원룸 계약을 하면 되겠지만

빨래용 및 주방용 세제, 쌀을 구매할 필요가 없는 데다가 수도비나 인터넷비, 관리비, 전기세 등등에서

해방된다는 것까지 생각하면 상당히 경제적이기까지 하다. 실질적으로 같은 월세라도 매월 지출 계산

마쳐보면 최소 50만원씩 빠져나가는데 어떻게 고시원이랑 비교선상에 둘 수 있겠어.

무엇보다 타인과 얽히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 단점이라고 고시원을 소개할 때면 반드시 언급되지만

역으로 보았을 땐 장점이 되기도 한다. 적어도 외로울 구석이 없거든. 사람은 혼자서 고립되면 반드시

병들기 마련이다. 육체적인 병은 시간이 지나면 낫던가 하겠지만 정신적으로 병이 들어버리면 답없다.

모두가 퇴근하고 완전히 비어버린 상가 건물, 주말의 대학교, 외곽의 지하철 역. 인적이 없는 장소에서

자신의 발자국 소리만이 울려퍼지는 것을 듣기를 좋아했던 나였는데 설마 내 방안에서 울려퍼지는 내

발자국 소리가 끔찍하게 들릴 줄은 상상도 못했다. 일주일간 아무런 대화도 하지 않아서 자문자답하기

시작하는 내 모습이 너무나도 비참하더군.

나를 찾아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임과 동시에 이는 내가 찾아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에 초래된 일이다.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없음과 동시에 내가 필요로 하는 사람이 없어서 자연스레 혼자가 되어버렸다.

이러니 강제적으로 타인과의 연결점을 구축할 필요가 있었다. 나의 인망이 비실대고 보잘 것 없으니까

강제적으로 인망 속에 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잘 살고 있다. 아침 출근할 때마다 현관에서 마주치는 이웃이랑 멋쩍게 인사하고

퇴근하면 건물 앞에서 담배 피는 이웃이랑 가볍게 목례하고. 주말 점심에는 주방에서 마주친 이웃이랑

가볍게 안부 인사 나누고 이따금씩은 사진처럼 먹을 것을 받기도 하지.

 

 

 

 

 

이번 주말에는 무슨 연유가 있는 건지 유독 이웃간의 정이 넘쳤었다. 옆집 사는 예민하신 분으로부터

스팸을 받아서 이것으로 짧은 기만 글이나 쓸까 싶었더니 그새 고시원 원장님과 아래 사는 분에게 또

과일이나 찌개류를 선물 받았다. 비록 내 인망이 두텁지 못하고,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못해도 이렇게

지내다 보면 어느샌가 가슴 한켠이 풍족해지는 것을 느낀다.

노가다도 중독이 된다 하던가. 고된 하루 일과를 마쳤을 때 반장님들과 정답게 나누는 인사가 보람을

느끼게 만들고 동시에 지친 몸은 통장 잔고를 보면 금융 치료가 되는데 일반 회사와 다르게 자유로운

몸이라서 결과적으로 심신이 지극히 안정되어 한번 맛보면 벗어날 수 없다. 고시원도 그런 것 같더라.

처음에는 비록 적응하기 힘들겠지만 살다보면 익숙해지고 익숙해지면 편해지고 그러다 보면 이웃과

친해져서 심리적으로 안정된다.

가위에 눌리거나 악몽을 꾸었을 때도 전혀 무섭지 않다. 비유하자면 찜질방 한복판에서 공포 영화를

보는 기분이다. 옆방에서 코를 골고 복도에서는 새벽부터 출근 준비하는 사람들로 분주한 가운데 왜

악몽을 꾸고 두려워할 필요가 있지.

마음이 병든 것 같으면 사람을 만나봐. 만날 사람이 없으면 내게 연락이나 해. 나도 넘쳐나는 게 지금

시간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