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 가면 꼭 먹어야 하는 음식 목록에 어묵이랑 씨앗호떡 그리고 밀면이 있다. 부산에 간 첫날 씨앗호떡을 먹었을 때는
작년 허리 박살나서 병원 신세를 지다가 퇴원하고 집에 가다가 그냥 사먹은 호떡이랑 얼추 맛이 비슷비슷해서 실망했었지.
어묵은 먹어볼까 싶었는데 길거리에 사람이 너무 많은지라 서서 통행을 방해하며 먹기 좀 그래서 그냥 안 먹었다. 모 유명
가게에서 먹는 게 제대로라고 지인의 추천을 받았지만 여행 일정상 거기까지 갈 겨를은 없었다.
밀면이 뭐지. 냉면 같은 건데 밀로 만든 건가 생각하며 어쨌든 해운대 인근에 가야밀면이라고 유명한 밀면 맛집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가보기로 결정했다. 해운대역에서부터 중동역까지 지하철로 한 정거장 정도가 되는 거리를 걸어갔고 가게가
오전 10시부터 영업한다기에 근처 피시방에서 해야 하는 업무를 마무리한 다음 천천히 언덕을 올랐다.
지난 번 방문했던 다른 맛집도 그러하듯 부산에서 소문난 맛집들은 대게 허름한 것 같다. 도대체 언덕의 어디까지 올라야
식당이 나오는가 기웃거리다가 커다란 절도 지나고 공관을 지나서 이런 위치에 식당이 있을리가 없는데 싶은 시점에서야
드디어 칠이 다 벗겨진 간판의 가야밀면 식당이 눈에 들어왔다.
아침이라고 하기에는 늦고 점심이라고 하기에는 이른 시간대의 주말이었는데도 안에는 손님으로 가득했다. 줄은 없었지만
이런 시간에까지 줄이 있기는 전국에서 인기가 급부상한 식당이 아니면 힘들겠지. 이런 점을 감안해도 굉장히 인파가 많은
편에 속했다. 애시당초 바깥에 나란히 주차되어 있는 차량의 행렬로 어느 정도 감이 오긴 했다만. 마침 딱 가게에 들어서니
가족 한 명이 식사를 마친 참이어서 운 좋게 바로 앉아 주문을 할 수 있었다.
만두 한판에 밀면 곱빼기를 주문했는데 그럼에도 겨우 15,000원밖에 소모되지 않을 정도로 매우 가격이 저렴해서 부담이
들지 않았다. 자리에마다 키오스크가 설치되어 있어서 곧바로 주문과 결제를 진행할 수가 있었고 점내에 종업원은 음식을
가져다 주고 자리를 치우는 한 분, 밑재료를 준비하는 한 분이 보여서 굉장히 인력 감축이 되는구나 감탄했다. 여기에다가
AI 서빙로봇까지 들어오면 나중에는 밑재료 준비하는 직원 한 명만 고용하게 되겠네. 태양열 발전으로 전력까지 충당하면
어마어마하게 축재할 수 있겠다고 뜬구름 잡는 생각을 늘어놓다보니 어느새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다.
주문한 밀면이 내 얼굴보다 큰 대접에 담겨져 나왔을 땐 첫째로 이걸 다 먹을 수 있을지 걱정했고 둘째로는 시뻘겋게
보이는 국물 때문에 매워서 못먹을까봐 걱정했다. 하지만 걱정했던 게 바보 같이 느껴질 정도로 양을 잊게 만들 만큼
맛있어서 주문한 음식이 나오고 체감상 5분도 안 되서 이미 면수까지 흡입을 마쳤고 맛은 맵찔이인 나조차도 맛있게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매콤하면서도 달콤했다.
따끈따끈한 찐만두를 한입 베어문 뒤 젓가락으로 면을 한웅큼 집어들어 삼키고 열심히 우물거리다가 대접을 들어서
살얼음이 떠 있어 시원한 면수를 들이마셔 개운하게 입안을 헹구니 음식 소재를 다룬 만화 속 인물들이 내는 극적인
표정이 저절로 그려지는 듯했다. 손님이 많아 북적거리는 식당 내부였는데 나 혼자서 4인 식탁을 차지하고 있는 게
다소 눈치가 보여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는데 밀면 한입을 먹으니까 주변따위는 전혀 신경쓰지 않게 되더라고. 계속
만두와 면을 번갈아 먹다보니 어느새 포만도가 적당히 올랐고 그에 반비례하여 음식의 양은 줄어갔다.
살짜쿵 매콤한 맛이 있어서 질리지 않고 동시에 달달한 맛이 중독성과 감칠맛을 더해 젓가락질을 쉬지 않게 만든다.
특히 밀면의 식감이 문자 그대로 찰지다고 해야 할지. 면이 너무 질기지 않아서 쉽게 이로 끊어낼 수 있고 얇팍하지
않기 때문에 면을 씹기에도 좋았다. 원래 차가운 국수는 그다지 선호하는 편도 아니고 서울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냉면이나 쫄면의 경우 끊어내기 힘들어서 먹고 있으면 피로해지기 쉬운 반면 여기 밀면은 모든 게 딱 좋았다.
돌이켜 보면 만두의 맛이 밀면의 강렬한 맛에 완전히 죽어버리기 때문에 같이 먹는 게 그다지 좋은 선택은 아니었던
것 같고 만두가 나왔을 때 기다리지 말고 단순히 전채 요리처럼 집어먹을걸 생각이 들더라. 그렇지만 원래 볼따구를
잔뜩 부풀리고 먹기를 좋아해서 맥도날드에 가서도 반드시 치즈 버거 한입에 왕창 감자튀김을 입안에 쑤셔넣는지라
크게 불만은 없었다.
안에 들어있는 채소. 얇게 썬 오이인지 무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삭아삭 씹히는 것이 또 재미있어서 짜임새가 괜찮은
짧은 극 하나를 감상한 기분 같았다. 뭔가 더 말할 게 없군.
식사를 마치고 이미 주문한 시점에서 계산까지 끝났으니 인사 나누고 훌훌 일어나 가게 앞에 있는 커피 머신에서
공짜 커피 한잔 뽑았다. 그 향을 즐기며 혹여나 가게가 이미 폐업했거나 이전했으면 어쩌지 걱정하며 나름대로는
힘겹게 걸어올라왔던 언덕을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어내려가니 기분이 좋아졌는지 나도 모르게 콧노래가 나왔다.
단숨에 기분 좋은 주말로 바뀌었군.
이 흥을 그대로 유지하고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부산에 다시 들를 일이 있으면 한번 더 방문할 거 같다. 아끼는
후배나 동생이랑 함께한다면 여기에서 식사 한끼를 대접하고 싶군. 가격도 저렴하니. 다만 아쉬운 점은 인근에
괜찮은 카페가 없다는 거. 식사 마치고 자판기 커피 마시는 것도 꽤 운치있긴 하지만 이 여운을 안고 경치 좋은
카페에 앉아 느긋하게 커피 한잔에 소화시키고 내려갔으면 더 좋았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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