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발하러 가면 미용사분과 시시콜콜한 잡담을 나누는 편이다. 가만히 눈 감고 살짝 졸고 있는 것도 좋지만 나로서는
조금이라도 더 다양한 간접 경험과 지식을 쌓는 일이 득이 된다는 생각이 앞서더군. 천만 중에 다행으로 미용사분도
과묵한 손님 상대하며 기계처럼 머리를 깎는 것보단 두런두런 온갖 말을 나누는 편이 시간도 빨리 가고 육체의 피로
역시 덜느낄 수 있어서 선호한다고 하니 이해가 일치했다. 그래서 이번에도 역시 근황에 대해 묻고 이야기했는데 꽤
나이 지긋한 이 미용사는 취미로 드럼 연주를 배우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손주를 보고 있는 나이에 새로운
기술을 배운다는 것이 쉬운 선택이 아니라 생각하여 그 열정이 대단하다며 응원했는데 도리어 쑥쓰러워하며 지금은
젊어서 모르겠지만 나이 들면 인생은 구멍 투성이가 되니 그 틈을 채울 취미를 찾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을 뿐이라
대답하셨다.
나이 들면 영원할 거라고 생각했던 부모도 세상을 떠나고 친한 친구도 저마다의 바쁜 삶으로 거리가 멀어지며 또는
최악의 경우 사고나 병으로 먼저 죽을 수 있다. 직장 생활이라는 것도 천년이고 만년이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아직 젊을 때야 간단히 이직하고 재취업이 가능하겠지만, 나이 삼십줄을 넘기는 순간부터는 새 직업을 구하는 것이
여간 만만한 일이 아니게 된다.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 틀린 말 하나 없긴 해. 특히 사는 환경상 주변에 아는 노안이
꽤나 많은 편에 속하는 사람으로서, 하릴 없이 도로가에 앉아 시간을 죽이고 있을 뿐인 어르신을 많이 본 탓에 더욱
와닿기도 했어.
인생이 무너지기 시작하는 시점은 언제부터일까. 아마 '할 일이 없어서 멍 때리며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아지는
시점부터가 아닐까. 구조물을 이루는 자재가 하나둘 빠지면 너무나도 작은 충격에도 쉽게 붕괴돠고 마는 것처럼.
하지만 아직으로서는 인생이 빈틈 투성이가 되어 삐걱댈 수 있다는 미래가 존재한다니 믿기지 않는구나. 지금은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서 오히려 무엇부터 시작하면 좋을지 감이 안 잡히는 상태가 많다.
당연히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우선도가 가장 높은 건 회사 업무지만 그 다음으로는 다양한 자격증의 공부와
그림, 영상. 그리고 지금 쓰고 있는 것처럼 글도 써야 하고 언젠가는 항상 꿈에만 그리고 설계만 하고 있을뿐인
소설. 실력이 닿는다면 이 모든 것들을 연계해서 모두에게 도움이 될만한 게임 하나 제작. 해야 하는 일이 너무
많단 말이지. 그게 "아직은"이라고 하는 소름 끼치는 접두사가 붙을 문장이 될 수 있다는 게 상상이 잘 안 된다.
그래서 "아직은" 해야 하는 일이 너무 많은 상태인가. 이 모든 게 젊어서.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없는 사실이 되는 것이 세상사니까 보태서 말하자면 너무나도 당연한 건데 나는 일만 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게 아니다. 가끔씩은 친구도 만나고 오랜 지인도 만나고. 술도 마시고 놀고 맛있는 밥을 먹으면서
평범하게 인생을 만끽하고 있는 편에 속한다. 지금은 그래서 그럭저럭 인생의 조밀도가 나름 높은 편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지. 만화도 보고 올해에 들어서부터는 즐길 수 있을만한 게임을 찾았다. 여기에 시간 뺏기는 게 가끔씩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 때도 있긴 하지만.
가끔씩은 그래도 너무 인생의 조밀도가 높아서 다른 요소가 끼어들 틈이 없는 게 오히려 독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예컨대 다른 친구나 만남을 가질 여유가 없는 거다. 매일 매일이 계획과 일정으로 가득 차 있어서 다른 게 낄 틈이
없어. 이런 생각은 올해 들어 본격적으로 가지기 시작했었고 바로 얼마 전에는 너무나 많은 자격증 시험을 한번에
준비했다가 결국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놓쳐버리는 불상사가 벌어졌던터라 향후 그 조밀도를 낮출 계획이었다.
하지만 신의 장난인지 별 생각없이 방문했었던 이발소에서 지금의 인생 조밀도 수준을 즐겨야 하거나 유지하고자
노력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어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럼 이제 선택해야 할 때지. 생각해보면 현재의 조밀도를 낮춰서 다른 요소를 인생에 구성한다고 해도 조밀도는
결국 현상 유지할 따름이다. 아예 비어있는 시간을 만드는 선택지는 미래의 내가 후회할 것 같군. 그러니 지금은
최대한 할 수 있는 것들을 붙잡고 성취해내야 할 때다. 인생의 조밀도를 유지해야겠지.
한편으로는 이해가 가질 않는구나. 일이 없는 어르신이 곧잘 찾아와서는 심심하다며 말벗이 되어주길 부탁하곤
했는데 할 일이 없다면 간단한 놀이를 시작해보거나 세상에 즐길거리가 천지이니 하나 집어보면 그만이 아닌가
대답해도 끝끝내 답을 거머쥐는 일이 없단 말이지? 기력이 쇠한 탓이려나. 인생의 조밀도가 낮아졌음을 스스로
인식 가능한 상태가 되어도 그것을 끌어올리지 못하는 게 늙는다는 건가. 개인의 성향 차이라고 단정 짓기앤 내
주변 노인들이 전부 같은 선택지를 취하고 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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