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의 장막이 드리운 창밖으로 냉기를 막고 있는 이 투명한 창 밖이 그저 암갈색 벽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세찬 눈발이 희끗희끗 모습을 드러내며 분주하게 창을 두드린다. 철충의 군세가 보이는 기세를 한파가 꺾는 게
가능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온 세상을 집어삼킬듯 쏟아지기 시작하는 폭설과 함께 오르카호의 대원들은 잠시
나마 짧은 평화를 만끽할 수 있었다.

걱정 마시오.폭설로 인해 고립된 아군에 대한 구조 작전은 교대를 통해 주야 구분 없이 진행 중이오.
또한 구조대에 대한 보급 역시 끊이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를 기울이고 있소.

특별 편성된 구조대뿐만 아니라 자원봉사단도 열심히 활약중이라고 하더군.

사령관은 현장에 투입된 인원들에게 뿌려진 '상점'을 어떻게 회수할지를 더 걱정해야 할지도 모르겠어!

...
기운을 복돋아 주기 위해 호탕하게 웃는 아스널과 그 옆에서 걱정하지 말라는 듯 의연한 자세로 서 있는
무적의 용을 보고 싱긋 웃었다. 내가 걱정하면 그녀들 역시 불안하게 되겠지. 이럴 때일수록 밝은 모습을
보여주며 활기를 잃지 말아야 하는 법이다. 꾸며낸 것일지라도 여유 있는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 조바심을
덜고 경직된 분위기를 누그러뜨려 주기 때문이다.
구조된 인원들에게는 아쿠아 랜드의 온천 온수풀에서 지친 심신을 치유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두었다.
나머지는 웃는 얼굴로 돌아온 아이들을 반길 준비를 하는 것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뒤를 돌아 지휘통제실을 떠나 복도로 나갔다.

으아아아, 아서! 살려줘!그르르륵...
복도에 나가자마자 기이하면서도 친숙한 광경이 보였다. 블라인드 프린세스 (이하 블프)가 멀린을 뒤에서
양쪽 겨드랑이 사이에 팔을 끼우고 가랑이 사이로 무릎을 넣어 신장의 차이를 이용해 멀린을 들어올리고
그대로 양팔에 힘을 주어서,간단히 말해 멀린의 주리를 틀고 있었다.
멀린의 안색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린 것을 보고 일단은 블프를 말리기로 했다.

잠깐만, 블프. 무슨 일인지 설명 좀 해줄래?

어머, 이 기척은. 사령관. 보시다시피 멀린의 스트레칭을 도와주고 있어요.

아서!!! 아서어어! 이 미치광이 식인 고릴라 같은 녀석을 말려봐! 이대로 가면
진짜 팔다리가 뽑히고 말겠어!

멀린, 그런 섭섭한 말 말아요. 이건 어디까지나 당신의 오르카호 적응을 돕기 위한
재활운동이면서 교육에 지나지 않는답니다.

이게, 이게 무슨 재활이얏! 지금 어?! 내 팔다리에 감각이 사라지고 있다고!
뭔가 익숙하면서도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은 어떤 상태가 떠오를 지경이라니깐?!
재활'을 하려면
일단 한번 죽어야하지 않겠어요?
이건 멀린이 산산조각 낸, 내가 일주일을 공들여 맞춘 퍼즐의 몫이예요!

으갸아아아아아아아아악!
오돌뼈를 씹을 때 들었을 법한 경쾌한 관절 소리와 함께 멀린의 몸이 축 늘어졌다.

..괜찮아?

....⌜반응이 없다. 시체인 듯하다⌟
나레이션 깔면서 장난칠 기력은 남았네.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다치지 않게 조심해. 블프도 너무 괴롭히지 말고.
축 늘어진 채 복도 바닥에 널부러진 멀린의 머리를 몇번 토닥인 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쓸어 가볍게 정돈했다.

히야야악!
제법 소녀답다고 해야 할까. 날카로운 고성의 비명이 고막을 때렸다.

아, 아서. 방금 그건 치사했어...

맞아요, 사령관. 피해자는 저라고요. 이건 치사해요.
제 정신적 피해와 시간 손실을 감수하고 기껏 멀린에게 '이 구역의 미친 X이 누군지'
교육해주는 중이었는데.

둘은 정말 막역한 사이네.
둘이 노는 것을 보면 근심 걱정 모두 잊게 되는 거 같아.
그 말을 듣자 블프가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노는 것도 있지만, 한편으로 정말로 저는 멀린의 재활을 돕고 있을 뿐이예요.

응? 무슨 뜻이야?

뭣! 야, 블프! 너 그 말하면!

사령관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자극이 너무 세서 정신을 못차리겠다고 멀린이 고민을
토로하더군요. 그래서 외부로부터의 자극에 익숙해지기 위한 훈련을 겸하고 있지요.

야아아아아!!!!!!

'아서'의 체온을 느끼며 여운을 즐기고 싶은데 사령관의 숨결이 닿는 것만으로도
전신에 전기가 흐르는 것 같고 허리가 통통 튀어버리는 것 때문에 고민이라며요?

앗 미안 멀린! 그랬어?

이이익! 블프! 더 이상 말하지 마! 이거 돌려줄테니까 이제 그만!
멀린이 황급하게 안주머니를 뒤적이더니 무언가를 꺼내 블프의 손아귀 안으로 건네었다.

퍼즐 조각이네?

거기 있었군요!!!!!!!
동체시력으로 포착하기 힘들만큼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로 도약한 블프가 팔뚝으로 멀린의 목 아래를 걸고
그대로 통과해 멀린을 그 반동으로 공중에서 2바퀴 정도 회전하더니 바닥에 꽂아버려다.

엄청나게...역동적인 클로스라인!

사령관, 지금이예욧!!!!

...!
나는 블프와 손뼉을 마주 치고 멀린의 위로 몸을 날렸다. 이윽고 공중에서 팔을 접고 그대로 멀린의 위로
수직낙하-
해서 타격하는 건 너무 미안하니까 떨어지는 척만 하고 살포시 팔꿈치로 멀린의 배를 꾸욱 눌렀다.

아으응...!

어디서 징그럽게 교태를!!!!
기세를 놓치지 않고 블프가 멀린의 다리를 낚아채고 자신의 다리와 엉키더니 몸통을 돌려 멀린의 정강이를 비틀었다.

끄으아아아아아아아!! 이딴 건 대체 어떻게 배운 거냐고!!!

..!
자칫하면 인대를 다칠 수도 있겠다는 걱정에 멀린을 보호하고자 블프의 허벅지 사이에 고정되어 있는
멀린의 정강이에 손을 비집어 넣어 살짝 틈을 벌려주었다. 하지만 그 부드럽고 따뜻한 살덩이 사이에
손이 끼자 본연의 목적을 잠시 잊고 손아귀에 착 감겨오는 멀린의 안다리살을 자기도 모르게 주무르고
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되었다.

아..으읏!

요, 용살자..?! 무엇을...

북극곰이 멸종할 때까지...

네녀석들 도대체 복도 한복판에서 무슨 짓거리를 하는 거냐...?!
고립되었던 부대의 구출 작전을 완수하고 보고하기 위해 지휘실로 향하던 사이클롭스 프린세스다
기괴한 형상으로 엉킨 채 복도를 구르고 있던 우리를 발견하여 이 사건은 겨우 진정되었다.
사이클롭스 프린세스는 체통 좀 지키라며 셋을 나무랐지만
마지막에는 '이런 게 오르카 답다면 오르카다운 것'이라며 어이 없어하면서 함박 웃음을 터드렸다.
자리를 파하기 전에 블프가 냅다 멀린의 머리를 한대 쥐어박고 곧이어 사이클롭스 프린세스에게도
머리를 쥐어박히는 모습을 뒤로 한 채 나는 기다리던 우리 오르카 대원들의 무사 귀환을 축하하러
격납고에 향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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