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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EA/▶ 라오 팬픽

여제의 쓸모(1).context

by 레블리첸 2025. 7. 12.

그래서... 날더러 저 기계들이랑 살라는 말이야?

....응. 미안하게 됐지만 지금 오르카 형편상 너 개인만을 위한 별채나 숙소를 제공하는 건 어려워.

너 지금 한가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데 말야.

난 인간이야. 너랑 같은 사람이라고! 너라면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개집에라도 들어가 살아주십시오-

하면 수긍할 수 있을 거 같아?

....네 뜻은 존중해. 하지만 지금 우리 인류가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를 망각하지 말아주길 바라.

너가 원하는 수준의 시설을 갖춘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출자하는 건 형평성에도 어긋날 뿐더러

전략적으로 불리하게 작용할 뿐이라는 것이 오르카호의 총론이야.

'총론'?

총론 같은 같잖은 소리따윈 집어치워.

여긴 다 네 헛소리에 따르기만 할 뿐인 씨받이들만 가득한데

저 고철 덩어리들한테 '의견'이나 '주장' 같은 게 어딨어?

.....

마리아 그레이스. 너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더욱이 군말없이 따른다는 것 이외에 취할 수 있는 선택지가 있는지 곰곰히 생각해 보고 발언하는 게 좋을 거야.

...

흥.. 좋아. 너가 하는 말에는 나름대로의 일리가 있으니 따라주겠어.

하지만 어디까지나 투표권이 보장되는 한 명의 인간으로서!

생활 가능한 독립 거처의 조속한 확보를 강력히 촉구하겠어.

이 사안에 대해서는 오르카호에 정식으로 청원할 거야!

그래, 너가 생활하는 데에 불편이 없도록 할게.

여제는 머리칼을 손으로 쓸어내리고는 몸을 틀어 뒤로 돌아 지휘관실을 나갔다.

얼어붙은 공기 속에 대원들이 안쓰러워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멋쩍게 웃었다.

엠프레시스 하운드 애들이 거칠긴 하지만 심성은 착한 아이들이니 잘 챙겨주겠지...

퍽 !

아읏, 윽....

육중한 타격음과 함께 스스로를 여제라고 칭하는 여성이 바닥에 옆으로 쓰러져 몸을 새우처럼 말고

복부를 움켜쥔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아이, 씨발련아. 내가 작작하라고 했지.

아구구- 여제 님! 바닥은 더러워요~ 어서 일어나세요~

이.... 개...같은...

우리가 뭐 빠지게 임무 마치고 돌아올 때마다 비 냄새, 흙 냄새 옘병하는 거로는 내가 뭐라 안 하는데

청소 당번이면 청소해야지 왜 자꾸 우리 배터리한테 떠넘기고 지랄이야 지랄은.

진짜 청소 못하게 손모가지 다 부숴뜨려줘?!

우리 여제 님! 설마 똥개랑 배터리가 한번씩 알려주기까지 했는데

그것마저 제대로 배우지 못하는 빡대가리인 거야~?!

지랄... 하지마!

내가 너희들의 오물을 처리하고 뒤치닥거리나 할 거 같아?

주인도 못알아보는 한낱 고.. 아악!!

여제가 말을 이으려는 찰나 재빠르게 다가온 천아가 여제의 손등을 맨발로 즈려밟았다.

아이쿠! 여제 님, 지금 저한테 하나 빚지신 거예요~?

지금 '고철 주제에'라고 말하려고 했죠? 그 말했으면 진짜 장화한테 차여서 갈비뼈 다 작살나요~

자 '감사합니다' 해보세요.

씨발..... 씨발! 이, 이.. 발 치우지 못해?!

이 더러운 남창 새끼한테 아양이나 떠는 더러운 정액 받이년이!

 

 

어머?

아, 이 병신 같은 년은 씨발 좋은 말로 해줘도 알아쳐먹질 못해요.

지금 네 입장이 어떤지 몰라? 주제 파악이 안 돼?

'아쿠아 칙' 침수액 자궁에 부어서 자궁 파열이라도 시켜줘?

......으읏..

아- 너 '아쿠아 칙'이 뭔지도 모르지? 존나 약해빠져서 전투나 훈련은 커녕 청소도 못하는 개폐급이잖아.

진짜 바깥은 어떤지도 모르는 대가리 꽃밭인 년.

너가 진짜 우리 핫팩 성욕 해소용이라도 쓸모있으면 다행인데

어쩌냐? 우리 핫팩이랑 한 번 손이라도 잡고 싶어하는 년만 수두룩해서 넌 그마저도 못하겠네?

야, 그만해. 진짜 쟤 손등 박살나겠다.

천아는 그제서야 눈웃음을 지우고 식은땀으로 범벅이 된 채 이를 꽉물고 비명을 참고 있는 여제를

내려다 보았다. 천아는 발을 살짝 들어 치우고는 민망하다는듯이 웃었다.

아차차....

하마터면 진짜 손모가지 가루로 만들뻔 했잖아.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지 그랬어, 마리아? 말도 못하는 벙어리인줄 알겠어-

야, 개폐급.

이따가 빡대가리 오면 청소 다시 한번 더 알려달라고 해라.

그리고 또 빡대가리한테 짬 때리면 진짜-

네년들따위!

?

네년들따위....

내가 마음만 먹으면 네년들을 이용해서 자멸시키게 만들 수도 있었어.

그때 그랬던 것처럼.

마리아가 이를 갈며 다 뭉개진 발음으로 말을 이었다.

내가 그러지 않고 있는 건 어디까지나 니들이 좋아서 죽는 그 사령관 때문이라는 거.

잊지 마라. 나는 네년들이랑은 달라.

푸흐...

아하하하하하하!

이 미친년이 진짜 웃기는 재주가 있네?

사령관의 위신을 생각해?

이 멍청한 새끼가 진짜 누굴 바보로 아나.

아무리 생각해도 너는 여제가 아니야. 여제의 존나 하위호환일 뿐인 심심풀이 샌드백 정도겠지.

그래, 너가 우릴 찢어죽이고 싶어서 '특수명령권' 써서 우릴 공멸시키는 데 성공했다고 치자.

그럼 그 다음은?

바깥에 나가서 대기하고 있는 애랑 싸우고 탈출이라도 감행할 거야?

도망치긴 어딜 도망쳐. 그냥 그대로 구금되는 거지.

그리고 봤지? 주인님이 우리를 얼마나 끔찍하게 아끼는지.

그런 짓을 해놓고 '걔네가 화나게 해서 그랬어요' 반성하는 거로 끝날 거 같아?

넌 이미 알고 있을 거야. 너가 그 다음에 어떻게 될지.

아마 죽는 게 낫다고 생각이 들 정도로 처절한 고문을 당하게 될걸.

아! '고문'은 아니지. 너따위한테 얻어낼 정보따윈 없으니까. 그저 끝없는 화풀이에 불과하겠네.

와~ 근데 죽을 수도 없어.

24시간 감시 당할 거고 치명상을 입으면 수복할 거 아냐?

......

그러니까 처신 똑바로 해.

별로 똑똑하지도 않은 거 같은데 씨발 눈치라도 챙기라고.

장화가 아직까지도 바닥에 널부러져 있는 여제를 한손만으로 번쩍 들더니

툭 밀쳐서 침대에 앉혔다. 마리아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장화를 노려보다가

살기 등등한 천아의 시선에 움츠리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나 왔어어!

와 진짜 매점 조금만 더 빨리 갈걸! 짜부되서 죽어버릴 뻔했네!

내가 말했을 터다, 지금 가면 스틸 라인 저녁 점호 전이라서 엄청나게 붐빌 거라고...!

하여간에, 음료수는 책상 위에 올려둘테니 각자 가져가라.

아 그리고 과자는 개인적으로 남는 참치캔이 있어서 아무거나 대충 사 왔다.

사양하지 말고 먹도록.

으엥? 아니 잠깐, 분위기가 이거 왜 이래?

잠깐 매점 다녀온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

와- 나 영화 보면서 팝콘 먹는 거 개 좋아하는데 우리 똥강아지 어떻게 알고 사 왔어?

고마워, 잘 먹을게!

....음. 대원의 취향을 파악해두는 것도 좋은 리더의 덕목이지.

바르그가 장화한테 무심하게 음료수를 던졌고, 장화가 낚아챘다.

바르그는 힐끗 마리아의 왼쪽 손등을 보고 음료수의 뚜껑을 돌려 열기 쉽도록 만든 다음 코앞에 건네주었다.

마리아는 작게 혀를 찬 뒤 음료수를 오른손으로 받았다.

뭐야? 뭔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와, 그래도 우리 배터리가 서둘러준 덕분에 영화 시작 시간은 안 놓쳤네.

여제 님~ 화면 좀 켜주실래요? 겸사겸사 불도 꺼주시면 감사하겠어요~

....흥.

여제 마리아가 몸을 일으켜 숙소 중앙의 모니터를 켜고 곧이어 방의 불을 껐다.

영화가 시작하기 전 화면에는 광고가 송출되고 있었다.

....잠깐 나갔다가 오겠다.

엑??! 안 돼! 진짜 조금만 있으면 영화 시작해버리는데!!

지금 광고 5편만 지나면 시작할걸?! 초반부 놓치면 어쩌려고!

금방 화장실 다녀오는 거니까 신경 꺼!

안절부절 못하는 파프니르를 뒤로 하고 여제가 방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야, 씨발. 보조 배터리.

너 앞으로 쟤가 청소하라고 하면 쌩 까. 등신같이 오냐오냐하지 말고.

하지만 그랬다간 아마 지금까지도 청소하고 있었을걸?

그냥 내가 하는 게 훨씬 빠르고 깨끗..

역시 내가 한번 더 교육하는 것이 낫겠다. 다음번에는 직접 청소 작업의 감독을 병행하도록 하지.

잘 가르쳐줘~ 함께 쓰는 공간인데 더러우면 찝찝하잖아.

아니, 저기요?! 너가 무슨 상전도 아니고! 직접 알려주면 되잖아?!

야, 야. 됐어. 저 년이 퍽이나 그런 귀찮은 일을 하겠다.

어차피 여제는 너나 똥개랑 더 친해지는 게 마음 편할 거야.

커버 쳐줘서 고마워, 빨간 풍선 젖탱이 씨?

역시 동생 생각해주는 건 우리 언니밖에 없다니까.

.... 히잉... 그래도 얼른 여제님이 우리한테 마음 열었으면 좋겠다.

우리한테 마음을 여는 거보다

남친님한테 다리 벌리는 게 먼저일지도?

뭐뭐뭐뭣???!

제발 품위라는 것을 지켜주면 안 되겠나!

하....

왁자지껄 소란스러운 엠프레시스 하운드 숙소를 뒤로 하고 여제는 잠시 벽에 기댄 채 천아가 밟았던

손등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가까이 인원 현황표를 들고 서서 기다리고 있는 레프리콘에게

"잠깐 화장실."이라고 짧게 말하고는 어두운 복도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취침 연등 시간. 오르카호의 어두운 복도에는 고음역대의 여자 웃음 소리가 간간히 메아리치곤 한다.

일정 간격마다 서 있는 불침번들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어설프게 시선을 피하면서 여제는 걸었다.

몇번째인가의 소화전 앞을 지났을 때, 여제는 심상치 않은 기척을 감지하고 발길을 멈추었다.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소화전 앞에는 하나의 인영이 서 있었다.

소화전 경광등처럼 빨간 안광은 뚫어버릴 기세로 여제를 향하고 있었다.

...누구야.

또각 또각. 구둣소리가 작게 울려퍼지며 사람의 형체가 점점 가까워졌다.

안녕하세요. 저는 리제라고 해요.

-(2)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