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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ary/▶ 근무 일지

20201208 일용직 현장 노가다 근무 일지 (하수도 박스)

by 레블리첸 2020. 12. 10.

 

 

 

 

아침 8시부터 시작하는 일이고 버스로 30분밖에 안 걸리는 현장인데 습관대로 5시에 일어났다.

기상했는데도 3시간 정도 여유가 있다니 기분이 묘했다. 잠이 안 와서 스마트폰이나 보다 대충

편의점에 들러 김밥을 사먹고 현장에 도착했다. 늦지는 않았는데 현장에 와보니 이동을 해야만

한다더라. 아무튼 드디어 일할 곳에 도착하니깐 8시 30분. 그런데 다짜고짜 방진복을 위아래로

입힌 다음 강물 낚시할 때 물에 들어갈 수 있게 해주는 그런 방수 슈트를 입힌 뒤에 맨홀 아래로

내려가라고 하더라.

딱 본 순간 '잘못 걸렸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하수도 박스로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보니 역겨운 냄새가 진동하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현장에서 제공하지 않았는데 지난 번 지하주차장 에폭시 작업할 때 받았던 방진 마스크

사용하니 악취가 직접 코를 찌르진 않았지만 끈적하고 따끈한 내부 공기가 잘 알려주더군.

내부는 무릎 아래까지 올라올 정도의 깊이의 높이로 물이 차 있었는데 보나마나 하수였다.

즉, 깨끗한 물은 결코 아니라는 것. 걸을 때 어쩔 수 없이 사방팔방으로 튀어서 조심해야만

했다.

내부 방수 페인트칠 보조라고 들었는데 무슨 일을 하는가 봤더니 천장면과 벽면의 습기를

'화염방사기'로 태워서 날려버리면 다른 누군가가 페인트를 뿌린다. 그리고는 그 페인트가

도포된 곳에 불길을 쏘아 굽는 일을 하는 거였다. 말로 들으면 되게 간단하고 쉬운데, 사실

계속 양손에 들고 있어야 하고, 무거운 가스통을 바닥에 질질 끌면서 이동해야만 하는데다

불을 조심히 다뤄야 하고 장소가 장소라 협소했기 때문에 다들 신경이 곤두서있었다. 물론

토치의 소음이 매우 크고 다들 마스크를 쓰고 있기 때문에 얼굴의 사이에 주먹 하나 정도가

들어올 정도로 근접하지 않으면 뭐라고 말하는지 분간하기도 어려웠다.

 

 

 

 

 

 

 

조명이 설치되어 밝은 곳도 물론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구간도 있었는데, 혹여나 걸을 때

바닥이 뚫린 곳으로 추락해서 똥물 속으로 쳐박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까 오싹했다.

맑은 물이 아니라 바닥이 전혀 보이지 않고 부유물들이 떠다니는데 악어 같아서 무섭기도

했다. 물론 아무리 오염된 물에서 살 수 있는 생명체라도 이 물 속에선 살 수 없을 것 같다.

중간에 쉬는 시간에 물을 주셔서 마시려고 마스크를 벗는 순간 그냥 물 안 마시는 게 훨씬

건강에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더군.

보안경은 습기가 차면 더 일하기 힘들 것 같아서 챙기지 않았고 고무장갑은 꺼낼 겨름이

없어서 못썼는데 다행히 랜턴이 매우 유용했고 자세가 되어있다며? 칭찬을 많이 받았다.

일도 잘한다고 입사 권유를 받을 정도였다. 아쉽지만 지금 대학교 3학년이라..

고된 일을 하며 최대한 많은 딴 생각을 하던 중, 예를 들어 『디아블로2』나, 『테일즈 오브

데스티니2』, 『다크 클라우드』에서 지하 하수도에서 모험하고 때론 숙박도 하는 모습을

떠올렸는데 참 아바타에게 못할 짓을 했단 생각이 들었다.

 

 

 

 

 

 

다행인 건 오늘이 공기 마지막 날이라고 한다. 11시 정도에 페인트칠 공정이 종료되어서

밥을 먹으러 올라갔고 13시까지 쉬다가 내려가서 현장 정리를 시작했다. 원래 검사가 그

다음 14시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밀려서 3시가 되었다길래 내부에 설치되어 있던 아시바,

쓰고 난 페인트통, 온갖 목재들을 수거했다. 엿 같은 건 대부분이 이 하수 속에 잠겨있던

것들이라 들어올리고 싣는 과정에서 손에 묻었다는 점이다. 정말 엿 같은 기분이 들더라.

아시바는 맨홀을 통해 나갈 수 없기에 크레인으로 올릴 수 있는 곳까지 끌고 운반해야만

했다. 바퀴가 달려서 다행이었다. 하상이 '진흙'이라고 믿고 싶은 물질들로 쌓여있으므로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맨홀을 통해 통과할 수 있는 물건들은 모아서 마찬가지로 구루마에 실어서 맨홀 쪽으로.

너비가 큰 물건들은 완전히 반대편에 위치한 크레인 입구 쪽으로. 이동 거리가 상당했다.

다 끝내고 올라오니 16시였다.

집에 돌아가려는데 버스를 타려고 했지만 몸에서 역한 냄새가 진동을 해 조금 바깥에서

걸으며 냄새를 뺀 뒤에 지하철에 올랐다. 역시나 승객들의 눈총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