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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ary/▶ 아무 얘기

내가 모은 4천만 원 가져가실 분? "도태 방지 위원회"

by 레블리첸 2021. 1. 13.

 

 

 

 

 

비혼 선언을 하는 청춘들이 늘고 있다. 모의고사 결과에 울고 웃고 대학 생활로 마음 졸이는

애송이들이 결혼이랑 무슨 연이 있는가 싶어 재미있게 보인다만 아무튼 딴에 연애해보니까

결혼 생활이라는 것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느꼈는지 정작 결혼하라고 주변에서 닦달 받지도

않는 10대, 20대들이 비혼이라는 것을 선언하고 혼자 살겠다고 아우성이다.

꼬맹이들뿐만이 아니라 그래도 사회의 물 좀 먹었다고 하는 20대 후반부터 30대 중반까지도

자신의 인생에서 결혼이란 선택지를 영영 배제하겠노라 감히 선언을 하고 있다. 그중 욜로를

외치는 사람도 있고 또 무시무시한 미래가 닥칠 것을 대비해 자산을 축적해두는 사람도 있다.

욜로 외치다 골로 간다는 것에 대해 구태여 부연 설명을 덧붙일 필욘 없다. 나이 좀 더 먹으면

어느 순간 주변에 대한 시야가 트이고 스스로가 너무나 작은 돛단배에 의지한 채 풍랑을 맞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급히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가기 마련이니까.

오히려 가장 큰 문제는 낭비하지 않고 저축하며 평생 혼자서 살 수 있을만한 자산을 축적하는

비련의 달팽이들이다. 느려도 열심히 움직이며 잎사귀를 갉아먹고 몸뚱이를 불려온 그들에게

안식처는 존재할까. 그들의 거처는 훌륭하지는 않아도 나름대로 안락해서 사회의 풍파로부터

 

충분히 자기 몸을 지켜줄 수 있지만 그만큼 안전 불감증에 취약하다. 위험을 감지했을 땐 이미

너무 늦었다. 항로를 너무 많이 이탈해서 돌아올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혼자서 열심히 노를 젓거나 엔진을 가동하여 멋지게 항해해가는 모습에 자아도취할 수도 있다.

하지만 종착지가 없으면 항해하는 의미가 없다. 목적 없는 게임에서도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건

수업 빼먹고 피시방에 갈 때 짜릿함을 느낄 수 있던 때에 한정된 이야기고 게임에 시간을 쓰는

것이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 시점부터는 그 목적 없는 항해가 무미건조하게 느껴지지 않았던가.

목적이 없으면 언젠가 원동력을 상실하기 마련이다. 기능이 정지하는 순간 말단부터 썩어가기

시작하는 법이다. 열심히 몸뚱이를 불려온 달팽이는 어느 순간 깨닫는다. '어차피 평생 쓸 돈은

충분히 모았는데 무엇 때문에 분주히 움직여야 하지.' 기능하지 않는 생물은 사체다. 활공 중인

매 한 마리가 이내 발견하여 살점을 뜯어먹는다. 사실 평생 쓸 돈을 다 모았다는 말도 웃기구먼.

기력이 다 떨어져서 중도 포기하고 궁핍한 삶을 선택한 거겠지.

평생 일할 거라고? 단언하기야 20대의 비혼 선언만큼 쉽지. 그렇게 말하는 5060대를 찾아봐라.

평생 일하고 싶다 말은 하지만 정작 그들의 눈빛에는 불안이 깃들어있고 동공은 지쳐서 떨린다.

재미있게 살다가 적당히 늙었을 때 나 혼자 목숨을 끊을 거라고? 어릴 때나 혈기나 객기로 죽지,

괜히 나이 지긋한 어르신이 '죽지 못해 산다.'라고 말씀하시는 게 아니다. 그리고 가장 웃긴 말은

나름대로 사업을 운영하면서 편하게 돈 벌며 홀로 호의호식하겠다 하는 사람들이다.

독신주의면서 재벌이 아닌 사람은 없다고 단언할 수는 없겠지만 정확히 짚이는 인물은 없구먼.

혼자 사는 게 그렇게 좋다면 힘 있는 사람들은 왜 그걸 선택하지 않는 건지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인생이란 건 단판 승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지인이 말하기를 게임에 빗대어 표현하자면 결혼을

하고 나면 자신에 관련된 건 다 자식을 위한 반복 퀘스트에 지나지 않게 된다고 한다. 돈을 버는

것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식을 위해서다. 지긋지긋한 일상을 반복하는 것도 자식을 위해.

오로지 그것만을 위해서 살고 그 덕분에 살고 있다고 한다. 이미 자기 인생은 50대에 끝이 났다.

이후에도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는 '만렙 이후 콘텐츠'를 즐기기 위해서라고 한다.

비혼 선언하는 독신주의자는 결국 만렙을 찍고 만렙 이후 콘텐츠를 즐기기도 않은 채 쳇바퀴나

죽을 때까지 돌겠다고 말하는 기운 배의 선장님에 불과하다.

 

 

 

 

 

안타깝게도 비자발적 독신으로 인생을 마감해야 하는 사람이 존재하기는 한다. 나도 아직 젊지만

완전히 해당 후보군에서 제외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친구들이랑 술자리를 가지면 다 같이 한숨을

푹 내쉰 뒤 좋은 연인을 만날 수 있을까 답도 안 나올 고민을 씹으며 안주 삼아서 술잔을 부딪힌다.

내 친구니까 내게는 당연히 좋은 녀석인데 연인이 없는 것 역시 이해는 좀 간다. 이성이 끌릴 만한

요소가 없기는 하다. 친구도 내심 나를 보며 그렇게 생각할 테니 동병상련이다.

다른 친구들이랑 만나서 얘기를 나눠봐도 크게 다를 바는 없던데 아마 여자 남자를 떠나서 모두들

같은 고민을 떠안고 살아가는 모양이다. 마음을 내주려니 겁이 나고 마음을 받자니 의심이 생기는

딜레마에 빠져있는 것이다. 이러다 모두 양식장의 달팽이꼴이 되게 생겼다. 한편 일부 여성분들은

비혼 여성들만의 공동체를 만들어 운영하고 정부로부터 지원받기 위해서 정책을 추진 중이라더라.

만약 내가 정책의 시행에 밀접한 관계에 속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때 과연 그들만을 위한 정책이

국정운영에 도움이 될까 의문이 들지만 아무튼 핵심 화두는 상호 돌봄인 것 같다.

공동체를 비혼 여성들만이 하라는 법은 없지. 친구들과 고기를 썰다가 문득 이런 이야기가 나왔다.

혼자서 살 사람들만의 모임이 아니라 쓸모 없어진 내 한 몸 매에게 뜯어먹힐 바에야 미래를 위해서

열심히 달려가는 중인, 똑바로 항해 중인 친구에게 보탬이 되고 싶다는 말이었다. 40살을 넘기고도

좋은 짝을 찾지 못했다면 결혼과 연이 없는 셈이니, 과거였다면 진작 전쟁터에서 총칼 맞아 죽었을

운명이라 생각하고 혼자 즐겁게 살고, 짝을 만나 결혼하고 자녀를 가진 친구 가정에게 죽었을 때에

이승에서 용돈이나 쓰라고 모은 돈이나 넘겨주기.

이른바 도태 방지 위원회란 거다. 아무튼 살기 위해 계속 돈 벌긴 하겠지. 우리 성격상 벌어도 항상

남게 벌고 남게 써서 통장에 차곡차곡 돈은 쌓일 텐데 혼자 죽고 나면 그게 다 국고에 환산되다니까

어쩐지 배가 아프다. 무엇보다 일부 여성분들은 여성의 비혼 비출생은 멋진 거고 남자 비혼은 그저

도태일 뿐이라고 하던데, 유전자를 남기지 못한다는 결괏값이 똑같은데 어떻게 주체의 차이만으로

이름을 달리 붙일 수 있단 말인가. 남녀 구분 없이 유전자나 자산을 남기지 못하고서 한줌의 흙으로

돌아가면 결국 도태된 거나 다를 바 없다.

대를 잇지 못한다면 최소한 모은 돈이라도 넘기련다. 그런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하며 못난이끼리

슬피 웃으며 술이나 마셨다. 그마저도 이제 혈기가 왕성한 때도 아니라 내일 없는 사람처럼 달리지

못하고 적당히 끊고 잤다. 부디 그냥 농으로 지나쳐서 훗날 또 이런 술자리에서 놀림당할 이야기로

다뤄지면 좋겠다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