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

 

 

 

 

요즘 뭐해라는 질문이 따갑다. 요즘 뭐하냐고 묻는다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다고 대답해야 하는데 이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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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하게 말하기가 꺼려지기 때문이다. 차고 넘치는 시간적 여유가 주어졌을 때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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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송세월하는 부류의 인간을 혐오하는데 정작 내가 그들과 한통속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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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도 눈에 보여지는 성과를 낼만한 일따위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런 사실을 망각하고 싶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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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부를 묻는 가벼운 인사조차 무겁게 여기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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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명거리는 참 많았지. 3개월 정도는 최근에 입사한 회사의 분위기와 업무에 적응한다고 정신 없었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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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로는 고시원으로 이사하고서 작업 환경을 개선한다면서, 와식 생활로 바꾸었더니 소화불량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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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통이 심하다며. 영악하게도 그 전부 유효해서 아무도 내가 탱자탱자 놀면서 주말에 낮잠이나 자는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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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심한 짓거리를 일삼고 있음에도 비난하지 못했다. 모르거나 사실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관심 없어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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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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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바쁜 척 떠들고 다녔지만 내 정체는 사실 한량이야. 누워서 남이 하는 게임 영상이나 야한 것을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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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시기나 조물딱거리다가 잠들고 깨기를 반복하는 폐인이지. 청수처럼 보였겠지만 정체된 고인물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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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와 학교는 누구나 다니고 있는 것이기에 따라서 당연히 일과가 있고 할당해줘야 하는 시간이 끝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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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가 시간이 생기는 것은 당연지사지. 호수 위 고고한 학처럼 보였겠지만 사실 담수 위에 갇혀 죽을 날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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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는 백무문 비단잉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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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가 끝나고 돌아오면 19시인데 집안 청소는 월요일, 수요일, 금요일에만 하고 빨래는 1주일에 한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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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이나 화요일에 하니까 빈말이 아닌 참말로 많은 시간이 남는다. 하지만 아무 것도 안 해. 여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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갇혀있어 반복하는 변명을 되풀이하자면 작업 환경이, 책상이 고정되어 버렸기에 낮은 침대에 허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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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힌 채 앉아 일기를 쓰고 나면 척추에 금이 갔던 영향인지 피로도가 급격히 쌓여 눕고 싶어지고 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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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뉘우면 작업 환경 개선을 위한 장치나 대안을 모색하다가 잠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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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면 다시 회사 가고. 돌아와서 일기 쓰고. 일기 쓰고 나면 피곤해서 뻗어버리고. 악순환 그 자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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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지금 나름대로의 묘안이랍시고 꺼내놓은 게 모니터로 사용중인 갤럭시탭S8플러스를 높이 띄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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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식 생활에서 입식 생활로 바꾼 것이다. 하지만 서 있으면 그만큼 체력이 빨리 소모되고 집중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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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워지지. 소화불량의 해결을 위한 대안이라고 생각한다면 아슬아슬하게 합격점은 넘긴 듯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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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하게 작업할 수 있고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가를 따져보면 여전히 불합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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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게 내 부족함과 게으른 천성 탓이다. 가로막는 건 아무 것도 없는데 그저 언젠가 물길이 트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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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을까 막연한 기대를 하며 말라가는 물 속에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다. 내가 상어면 진즉 죽었을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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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낱 민물고기에 지나지 않는 범부라서 그런 점에서는 다행이라고 여기고 있어. 대단한 사람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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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고 있는 사람에게 찬물 끼얹어 미안하지만 이게 내 정체다. 신비주의라며 가면을 쓴 채 살던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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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을 집어삼킨 나의 환상이 오히려 나를 괴롭히는 환상통이 되고, 그 괴리에 괴로워 진짜 내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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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의 모습을 서서히 드러내기 시작했는데도 여전히 콩깍지는 벗겨지지 않았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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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부터 이미 흐르지 않는 물은 썩는다고 가르쳐줬다. 역사서에서조차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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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지 않는 것까지는 사실 용서받을 수 있다. 하지만 진정한 죄악이며 최악인 점은 정체된 원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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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있으면서도 이것을 본격적으로 해소하지 않고 오히려 온갖 변명거리를 가져다가 기워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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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합리화하는 비겁한 행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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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나야. 구제할 방법이 없는 썩어빠진 잉여 인간이지. 머잖아 겨울인지 여름인지 혹독한 계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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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하게 고통을 가져올텐데 이 사실을 알면서도 전혀 대비하지 않아. 오히려 아무 책임이 없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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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이라며 안도하고 있는 자신. 주변의 생물보다 조금 덩치가 크고 힘이 세다는 이유로 나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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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괜찮겠지 빈약한 낙천스러움으로 겨우 눈을 가리고 있는. 거짓 안빈낙도의 삶을 영위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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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담수 안의 멍청한 잉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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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길을 걷다 문득 겨우 동네 목욕탕의 온탕 남짓한 크기의 담수에 갇힌 한 잉어를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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씁쓸한 마음이 들어 미소로 미리 그의 죽음을 배웅했다. 넌 곧 죽겠구나. 그게 곧 나인 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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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석은 죽어서 그 지대의 양분이라도 되어주련만 나란 놈은 과연 죽은 후 어떤 도움이나 될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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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낱 미물 취급 받는 잉어가 잉여 인간보단 나은 셈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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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정신이 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