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지녔던 믿음이 박살나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그중 첫번째는 내가 입대하기 될 즈음에는 통일이 되서 군대에 가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것이었고 두번째는 사랑니가 나지 않거나 사랑니가 나도 곧게 자랄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이번에 그 믿음이
산산조각나고 말았다. 여느날과 다름 없이 회사에서 근무를 하던 도중 간식으로 젤리를 받아서 씹어먹고 있었는데 안에서 웬 돌
같은 것이 씹혔다. 돌인지 오돌뼈인지 긴가민가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엄밀히 따졌을 땐 뼈가 맞았다. 별 생각않고 무엇이든지
뱃속에 들어가면 똑같다는 생각으로 꿀꺽 삼켰다. 황당하겠지만 이게 내 삶의 방식이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모금 들이키고 입안을 헹구는데 위화감이 느껴져서 치아를 혀로 훑어보는데 오른편 위쪽 어금니에 구멍이
뚫려있는 것이 감지되었다. 알고 보니 조금 전 씹어서 잘게 부수고 삼킨 게 내 치아의 일부분이었던 거다. 황당하겠지만 나 역시
무척 황당했고 혹시 모르니까 일단 주말에 치과 진료를 예약했다. 마음 같아서는 가까운 금요일에 곧바로 진찰을 받고 싶었지만
운명의 장난처럼 마침 그날에는 다른 휴가자가 있어서 연차를 쓸 수 없었다.
사진을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육성으로 '조졌네'라고 말한다. 당사자인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충치가 너무 심각한 수준이라
치아가 거의 다 썩어있는 상태였고 최근 깨어진 어금니는 충치가 이미 안을 다 갉아먹은 거라고 들었다. 충치는 일단 전염성
있는 질환이기 때문에 구강 내 치아가 다 감염되어 있는 것은 당연한 수순. 양치를 나름대로 열심히 하기는 했는데 그래봤자
한창 노가다 뛰던 시절엔 당연히 식사 후 양치를 하는 게 불가능했어서 2년 가까이 저녁 식사 후에 하루 한 번만 양치했었고
지금 회사 다니면서는 열심히 양치는 하지만 양치한 다음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빈도가 대폭 늘어서 치아의 상태가
끔찍한 것 역시 자연스러운 흐름일 것이다.
충치도 충치지만 사랑니도 상태가 좋지 않았다. 사랑니 4개가 있는데 그중 위의 2개는 곧게 자랐으나 각각 잇몸과 어금니를
압박하고 있었다. 어금니를 압박하고 있는 경우에는 특히 압박받은 어금니가 뿌리까지 휘어버릴 정도로 큰 압력을 받았기에
자칫하면 멀쩡한 어금니까지 잃게 될 수도 있는 상황. 그리고 아래의 두개는 누가 봐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만큼 아름답게
수평으로 자랐다. 게다가 완전히 턱뼈에 뿌리를 내릴 정도로 성장한 상태이고, 신경까지 건드리고 있는 상황. 뽑으려면 발치
전문 치과를 찾아가야 한다는 치과 선생님의 조언을 받았다.
이 지경까지 왔으면 고통은 물론이요 평소에 발음하기도 매우 힘들었을텐데 괜찮았냐고 물으시더라. 인생 자체가 고역이라
이정도 사소한 통증은 느끼지도 못했다고 중2병 대답을 하려다가 꾸욱 참았다.
어쨌든 일반적인 치과에서는 발치가 어렵다고 의사 선생님에게 직접 전달 받았으니 급한대로 사랑니 발치 전문의를
찾았다. 사랑니 뽑고 3일간 요양이 필요하다고 들었으니 금요일에 뽑으면 월요일에는 무사히 출근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여 금요일 연차를 냈고 당일 아침에 곧장 뽑으러 갔다.
사랑니가 양쪽에 다 있는 경우 오른쪽 왼쪽 나누어서 발치를 진행하는 일이 보편적이라고 하지만 빨리 뽑지 않으면
다른 치아까지 작살나기 일보 직전이라는 경고를 듣고 4개를 단번에 전부 뽑아버리자는 전문의의 제안을 수락했다.
위아래, 좌우까지 전체 4회에 걸쳐서 입안에 마취 주사를 맞았다. 따끔했는데 고통이 오래 가지도 않았고 참을만한
수준이었다. 금방 입안에 감각이 사라졌고 아랫 입술도 감각이 신기하더군. 다만 벌써부터 침 삼키기가 힘들어져서
상당히 불편했고 불편감에 비례하여 걱정도 커졌다. 하지만 걱정한다고 뾰족한 수가 생기는 건 아니지.
선생님이 알아서 다 해주겠지 생각하고 마음을 놓은 채 얌전히 누워 입 벌리고 있었다. 시술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데 대략 15분 정도 걸렸던 거 같다. 오른쪽 아래랑 왼쪽 위에 있는 사랑니 발치는 1분도 안 걸려서 톡톡 쳐 바로
뽑아냈지만 나머지 2개는 역시 상태가 매우 안 좋았는지 의사 선생님도 끙끙 앓는 소릴 내며 뽑으시더군. 퍽 죄송
스럽게도 나로서는 아무런 통증도 없었기 때문에 그저 발 뻗고 편안하게 있었다. 살벌한 전기톱같은 소리가 연신
들리긴 했는데 사랑니 발치 과정에 통증은 1도 없었다.
치과에 도착한 게 11시 40분이었고 사전에 진통제를 처방 받아 복용한 다음 엑스레이 촬영 찍고 본격적인 수술을 마친 다음
나와서 시술비 계산하니까 12시 40분이었다. 준비 기간이 오래 걸렸을 뿐이지, 실제 발치 시간은 10분 정도가 걸렸나. 다만
긴장했었기 때문에 전신이 땀으로 흥건했고 이미 샤워하고 갔었는데도 머리가 잔뜩 떡져있었다. 치료비는 11만원 정도였다.
다음날 오전 9시 30분에 소독을 받아야 한다고 하더군. 금요일에 연차 내고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토요일에 왔다면
꼼짝업이 월요일 반차를 쓰던가 해야 했겠지.
집에 돌아와 얼음 찜질하며 야동 보는데 마취가 풀리는지 환부가 지끈거렸다. 참고로 얼음 찜질은 냉동된 닭가슴살로 했다.
일상 생활에 지장이 있을 정도의 통증은 아니었고 오줌이 마려운데 참고 있는 것처럼 조금 안절부절 못하게 되는 수준이다.
마취가 좀처럼 풀리지 않아 아랫턱의 불편함 감각 및 은근한 지끈거림 때문에 무척 시간이 느리게 가는 것처럼 느껴지더라.
체감상으로는 4시간 정도 지난 것 같은데 시계를 보니 1시간 지났더군.
아마도 2주일 정도 회복 기간을 가져야 할 거 같았다. 오후 16시에 거즈를 제거했다. 피는 가급적 다 삼키는 게 좋단 말을
들었는데 깜빡했어서 습관적으로 전부 뱉어댔기 때문에 지혈은 조금 늦어진듯. 여기에는 황당한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입안이 굉장히 휑해진 느낌이라 위화감이 엄청났다. 저녁으로는 최대한 입을 적게 벌리고 먹을 수 있는 찬 음식을 찾다가
샌드위치를 떠올려서 사 먹었는데 이것조차 먹는 게 쉽지 않았다. 첨부한 사진을 보시면 알 수 있다시피 한입을 먹었는데
그 크기가 일본 만화 속 여고생이 베어문 빵처럼 앙증맞은 크기였다. 샌드위치 하나 다 먹는 데에만 30분이 걸렸다.
만약 사랑니 뽑고 상태가 안 나쁘면 주말동안 원고 작업을 하려고 했는데 절대 그럴 수 없을 것 같더라. 4개를 다 뽑아냈으므로
출혈량이 상당했고 게다가 4군데 마취 때문에 정신까지 몽롱했다. 여기에다가 식사도 제대로 못먹으니 기운도 없고. 덧붙여서
통증은 발치 후 둘쨋날인 21시 기점으로 완벽히 사라졌다. 그렇지만 입안에는 여전히 봉합이 된 상태고 실밥 제거는 다음주의
금요일로 예약이 되어 있으므로 양치도 제대로 할 수 없고 입도 마음껏 못벌려서 예민해져 있었다.
유희왕 마스터듀얼을 바로 얼마전 지웠는데 시기상조인 모양이다. 시간 빨리 보내기에는 이만한 게 없는데. 고시원 원장님이
내 상태가 걱정되었는지 병문안을 와주셔서 사랑니 4개 한번에 뽑았다고 말했는데 놀라셨다. 소설 '오발탄' 주인공도 홧김에
사랑니 4개를 한꺼번에 뽑았다가 과다출혈로 죽었다고 하시더라. 확실히 위험한 짓이기는 했다.
사랑니를 뽑고 어느덧 12일이 지났다. 통증은 완벽히 사라졌고 양치질할 때 환부였던 곳도 솔질하고 있다. 입안에는 뭔가
움푹 패인 곳이 혀로 느껴진다. 의사 선생님 말씀에 따르면 언젠가는 다시 그 부위에 잇몸살이 차오를 것이라고 하더라고.
하지만 과연 언제가 될런지 싶다. 근데 불과 2주일도 지나지 않았는데 살이 차길 바라는 건 무리겠지. 도마뱀도 아니니까.
실밥을 빼던 날 재미있는 일화가 있었는데 의사 선생님이 아랫쪽의 실밥만을 제거해주시더라. 4개를 한번에 뽑는 경우가
흔한 일은 아니니까 혹시 까먹으신 건가 싶어서 "선생님 위쪽 실밥은 안 제거하시나요?" 여쭈었더니 위쪽은 아예 봉합을
안 하셨다는 황당한 답변을 들었다. 어쩐지 사랑니 발치하고도 5일째까지 계속 피가 나더니만 그 이유를 알았다.
이전 충치 치료 건으로 방문했던 치과에서도 충치 치료하고 싶어도 사랑니 상태가 안 좋으니 사랑니 뽑고 다시 돌아오라
들었는데 일단은 10월까지는 조금 사랑니 발치 후 상태를 지켜볼까 생각중이다.
# 사랑니 발치할 때 솔직히 아팠나요?
4개 한꺼번에 뽑아본 경험상 고통은 없다. 무슨 근거냐면 내가 근거다. 당장 이 글 쓴 내가 1회에 4개 뽑은 미친놈인데
어디 가서 누구한테 물어볼 건데? 발치 과정의 고통을 숫자로 표현해볼까. 주사 놓을 때 따끔한 게 아픔 수준이 1부터
10 중에 '1' 정도 되는데 고통이 있냐 없냐 물으면 1도 숫자이니까 있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네. 그리고 그 1이 유일한
숫자이면서 동시에 가장 큰 숫자이니까 1이 가장 큰 수준이었다고 말해야겠지.
# 사랑니 발치하고 지금 가장 불편한 건?
치아와 잇몸 사이. 발치되어 생긴 분지 같은 부분에 자꾸만 음식물이 끼어서 안 빠진다. 식사 후 양치했을 때 많이 빼냈다
생각했는데도 양치한 다음 입안을 물로 헹구면 또 나오고 방에 돌아와서 리스테린으로 가글하면 또 나온다. 위의 사진이
바로 양치 후 물로 입안을 헹궈서 충분히 다 제거했다고 생각했는데도 뭔가 이물감이 느껴져 리스테린으로 가글한 결과
발굴해낸 음식물 찌꺼기. 아마 잇몸살이 다시 채워질 때까지는 계속 찌꺼기와의 싸움이 계속 될 것 같다. 그날이 도대체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 사랑니 발치 언제 하는 게 최고일까요?
어릴 때. 무조건 어릴 때 해야 한다. 아직 젊어서 회복력이 높아서 바닥에 면상 갈아버려도 3일 푹 자면 아무는 20대에
뽑는 게 최고다. 사랑니 뽑아내고 대략 6일 정도 아물지 않아 일상 생활 복귀가 힘든 수준이었는데 그것은 내가 이제는
튀김을 먹으면 3일 정도 몸져눕는 자연사 일보 직전 노인이라 그렇다. 먼옛날 아는 동생이 20살 되고 사랑니 뽑았는데
2일 정도만에 지혈까지 완벽하게 되고 다 나아서 나랑 같이 삼겹살에 소주 먹은 기억이 난다. 20대는 다 천하무적이다.
아마 사랑니 뽑아내고 빈 곳이 다시 살로 메꿔지려면 넉넉히 1년 이상은 두고 봐야겠지. 하지만 20대에 뽑았다면 아마
한달이면 채워졌을 거다. 20대는 회복력이 도마뱀 수준이니까 말이다. 마음만 같아서는 길거리의 20대 청년 턱주가리
뽑아다가 나의 턱에 교체하고 청년의 사체는 설악산 골짜기에 솟아오른 느티나무에 걸어둬서 까마귀 밥으로 주고 싶다.
그만큼 애정한다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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